슬프도록 청아하고 섬세한 음악히사이시 조의 역량 돋보이는 사운드, 판타지·로멘스와 완벽 조화

[문화비평]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슬프도록 청아하고 섬세한 음악
히사이시 조의 역량 돋보이는 사운드, 판타지·로멘스와 완벽 조화


2004년의 끝자락에서부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의 아홉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미야자키 작품과는 차별을 이루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미야자키의 기존 작품들에서 더욱 발전한 기상천외한 여러 이미지들과 캐릭터, 이야기 구조, 그리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식의 로맨스까지 포함되어 있다.

‘영국 판타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국의 동화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1986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19세기 말 유럽의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타지 모험극이다. 미야자키는 이미 5년 전부터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 화(化)를 생각하고 있었고 ‘할머니’가 주인공인 기상천외한 러브 스토리를 특유의 판타지에 담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빼어난 외모의 마법사 하울(스맙ㆍSMAP의 슈퍼 스타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과 주름투성이의 할머니인 소피(원로 배우 바이쇼 치에코(倍賞千恵子)의 목소리)라는 캐릭터는 그 동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등장했던 순수한 소년이나 예쁜 소녀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할머니가 된 후 하루하루 자신에게 닥치는 상황과 사건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대한 통찰을 지니게 되는 소피, 그리고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에서 전쟁에 맞서는 강한 ‘어른’이 되어가는 하울의 모습은 미야자키의 세계에서 낯설지 않은 변화들이다.

이들은 ‘마녀의 특급배달’의 키키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처럼 내면의 성장을 이루는 캐릭터들인 것이다. 이 두 주인공들의 변화와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모습을 통해 미야자키는 그가 줄곧 강조해 왔던 자아 혹은 정체성 찾기와 친(親) 자연, 반전(反戰) 등의 메시지를 표출한다. 거기에 전에 없던 러브스토리가 작품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을 하여 이채로움을 전해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트레이드 마크를 이루는 정교하고 다채로운 메카닉 디자인 역시 작품 최대의 볼거리 중 하나인 움직이는 성의 기막힌 모양새와 움직임을 비롯하여 전차와 여객선, 비행기, 비행선 등 다양한 소품들을 통해 빛을 발한다.

물론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손을 뻗어 움켜쥐고 싶은 하얀 구름, 꿈결 같이 펼쳐진 초원과 꽃들, 아름다운 항구와 바다, 살아 숨쉬는 듯한 거리의 모습 등 실감나게 채색된 풍경이나 움직이는 성의 세밀한 내부, 화려하고 우아한 왕궁, 포근한 감성을 전해주는 모자가게 등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풍요로운 색채와 그림들은 이 판타지에 강력한 흡인력을 선사해 준다. 그리고 거기에 슬프도록 아름다우며 때로 가슴 벅찬 기쁨을 전해주는 히사이시 조(久石 讓)의 웅장하고 섬세한 음악이 더해짐으로써 관객들은 작품에 완벽한 몰입을 이루게 된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
이 앨범은 히사이시 조의 사운드트랙 가운데 가장 긴 러닝타임(69분여)을 가지는 작품이다. 미야자키와의 작업이 늘 그러했듯, 히사이시가 작품의 이미지 콘티와 내용 설명만으로 이미지 앨범의 작업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중순이다(히사이시는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사운드트랙을 완성하기 위해 보통의 경우보다 서너 배 이상인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기간을 소요한다). 2003년 10월, 그는 이미지 앨범의 녹음을 위해 체코의 프라하로 향했다.

‘모노노케히메’의 교향조곡을 함께 작업한 바 있는, 마리오 클레멘스(Mario Klemens)가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아 흡족한 사운드를 완성해주었다. 이미지 앨범은 2004년 1월에 출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히사이시는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도 결과물에 만족해 했다. 그리고 히사이시는 곧바로 이미지 앨범의 모티브를 기초로 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앨범을 위해 30곡을 썼는데 그 중 17곡이 왈츠 풍의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곡들이다(앨범에는 26곡이 수록되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귀를 간질이는 수려한 선율의 왈츠는 메인 테마를 비롯한 여러 곡들에서 사용이 되었다. 앨범의 녹음은 2004년 6월 말 도쿄 구로다 구의 스미다토리 심포니 홀에서 이루어졌다. 풍성하고 섬세한 감성을 담은 각 곡들의 연주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호흡을 맞췄던 신일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담당했고,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히사이시 조가 직접 피아노 연주를 들려 주었다.

대부분의 곡들에는 그 동안 우리가 접해온 히사이시 조 특유의 향취가 물씬 배어 있다. 극적인 긴장감과 편안함,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을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스케일 큰 오케스트라 연주를 기본으로 힘찬 움직임의 느낌을 담은 행진곡 풍의 관현악 사운드, 정적(靜的)인 키보드 연주, 그리고 아련한 슬픔과 흥겨움을 동시에 표출하는 유려한 왈츠가 앨범을 가득 채운다.

부드러운 오케스트레이션과 차가운 피아노 연주로 서정성과 긴장감을 표출하는 오프닝 주제곡 ‘人生のメリ-ゴ-ラウンド(진세노 메리고라운도; 인생의 회전목마)’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오프닝 곡인 ‘あの夏へ(아노 나츠에; 어느 여름날)’를 연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메인 테마는 피아노, 현악, 관악 사운드로 다양하게 편곡이 된 ‘ときめき(도키메키; 두근두근)’, ‘靜かな想い(시즈카나 오모이; 조용한 상념)’, ‘雨の中で(아메노 나까데; 빗속에서)’, ‘花園(하나조노; 화원)’, ‘走れ!(하시레!; 뛰어!)’, ‘こいだね(코이다네; 사랑이야)’, ‘ソフィ-の城(소휘노 시로; 소피의 성)’ 등의 짤막한 곡들로 거듭나 영화 곳곳에서 등장을 한다.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곡들로 손꼽을 수 있는 ‘空中散步(쿠츄삼뽀; 공중 산책)’와 ‘さすらいのソフィ-(사스라이노 소휘; 방랑하는 소피)’를 가득 채우는 웅장하고 아름답고 또 슬픔을 머금은 듯한 왈츠의 선율은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힘차고 아련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가 담긴 ‘星の湖へ(호시노 우미에; 별의 호수로)’나 팽팽하게 당겨진 실과 같은 긴장감을 실은 날카로운 현악 사운드와 주술적인 목소리가 인상적인 ‘サリマンの魔法陣~城への歸還(사리만노 마호진~시로에노 기칸; 설리먼의 마법진~성에로의 귀환)’, 그리고 평안함을 안겨주는 서정적인 관악, 현악 사운드의 멋진 선율이 잔잔하게 펼쳐지는 7분 30초의 대곡 ‘星をのんだ少年(호시오 논다 쇼넨; 별을 삼킨 소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세계의 약속' 앨범 최고의 곡으로 꼽혀
앨범 최고의 곡은 영화의 엔딩 주제곡으로 사용된 ‘世界の約束(세카이노 야쿠소쿠; 세계의 약속)’이다. 사운드트랙 출시에 앞서 싱글로 선보였던 이 곡은 원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엔딩 타이틀곡인 ‘いつも何度でも(이츠모 난도데모; 언제나 몇 번이라도)’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었던 기무라 유미(木村 弓)의 2003년도 앨범 [流星(류세; 별똥별)]에 수록된 자신의 작품이다.

앨범을 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곡에 반해 영화의 주제가로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기무라 유미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영화에서는 이 곡이 그대로 쓰이는 대신 소피의 역할을 맡아 멋진 목소리 연기를 들려주었던 바이쇼 치에코가 새롭게 노래를 했다(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목소리 연기와 주제가 노래를 한 사람이 맡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인인 타니가와 ??타로(谷川俊太郞)가 새로 노랫말을 쓰고 히사이시 조가 편곡을 한 이 곡에서 바이쇼 치에코는 63세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맑고 순수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기무라 유미의 기교 있는 나직한 울림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바이쇼 치에코의 노래는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선율을 따라 흐르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왈츠 풍으로 멋지게 편곡되어 아련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해주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후반부에 포함된 탓에 이 곡은 6분 50초라는 긴 러닝타임을 지니게 되었다. 히사이시 조의 뛰어난 감각과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김경진 팝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1-12 15:11


김경진 팝 칼럼니스트 arzachel@seoulrecord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