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적 삶에서 일탈을 꿈꾸거든…일상의 피로를 위안하는 휴식의 영화, 제주도 비양도의 비경 담겨

[시네마 타운] 송일곤 감독 <깃>
도회적 삶에서 일탈을 꿈꾸거든…
일상의 피로를 위안하는 휴식의 영화, 제주도 비양도의 비경 담겨


숨가쁜 도시에서의 삶에 찌든 사람이라면 한 번쯤 충동적인 여행을 꿈꿔 봤을 것이다. 쫓기는 일상과 사무적인 관계로 부딪혀야 하는 사람들, 스트레스와 씨름하는 현대인들에게 피안에의 욕망은 본능에 가깝다. 디지털 영화 ‘깃’은 도회적 삶의 피로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누구나 꿈꾸는 잠시 동안의 일탈, 외딴 공간에서의 몽상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송일곤 감독(‘꽃섬’ ‘거미숲’)은 지난 해 개봉한 ‘거미숲’의 후반 작업 도중에 머리를 식힐 겸 다녀 온 제주도 여행 경험을 기초로 ‘깃’의 시나리오를 썼다. ‘깃’은 제주도 우도의 아름다운 비경들이 선사하는 안온한 휴식 같은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현성(장현성)의 직업은 영화 감독. 제주도 우도에서 10년 전 헤어진 애인을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 우도의 부속 섬인 비양도를 찾은 현성은 그 곳에서 모텔지기 소녀 소연(이소연)을 만난다.

고즈넉한 섬에서 모텔을 지키며 탱고 댄서를 꿈꾸는 쾌활한 삼수생 소녀 소연과의 만남을 통해 현성은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피곤한 일상과 저마다의 사연으로 마음이 허한 현성과 소연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애틋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감정의 결을 쫓은 멜로드라마
작가주의 감독 송일곤이 찍은 멜로 드라마라는 이유 때문에 화제가 됐지만 ‘깃’은 요란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첫사랑의 설렘이나 첫눈에 불똥이 튀는 열정적인 로맨스, 거창한 사랑의 철학도 찾아볼 수 없다. 하여 드라마틱한 연애의 순간이나 짜릿한 남녀 관계의 환상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권할만한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우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엽서 보여 주듯이 찍은 장면보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화면에서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급기야 태풍까지 몰아친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랑은 영화보다 심심하고 밋밋한 법. 연애에 서툰 거개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깃’은 담담한 이야기 속에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숨겨 놓았다.

드라마틱한 사건 보다는 인물들이 느끼는 미세한 감정 변화의 결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고립된 섬이라는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잠깐 동안의 판타지를 통해 정신적 위안을 준다. 실재하는 공간 ‘비양도’에서 모든 이야기가 벌어지지만 영화는 현실에서 살짝 발을 뗀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기억조차 희미한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갑자기 섬에 온 남자에게 10년 전 애인으로부터 피아노가 배달되고 모텔지기 소녀는 이국적인 탱고 댄서가 되는 꿈을 꾸며 실어증에 걸린 듯한 소녀의 삼촌은 말 없이 집을 나간 아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식이다. 현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 상황들로 채워진 ‘깃’은 현실적 맥락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을 통한다면 누구나 가까운 곳에 있는 판타지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무생물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탱고다. 수미쌍관을 이루듯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붉은 옷을 입은 매혹적인 여인이 머리에 깃을 꽂고 탱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혼자 추지만 나중에는 또 한명의 여자와 함께다. 경쾌한 4분의 2박자에 실린 관능적인 춤사위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더러,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에서 소연은 현성과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게 되자 그에게 탱고를 가르쳐 준다. 상대에 대한 호감을 말로 표현하지 못 하는 그들에게 탱고는 몸의 언어를 통한 또 다른 소통의 수단이 된다. 두 사람이 함께 추어야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탱고의 리듬에 관계의 소통을 희구하는 주인공 남녀의 심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매력
‘깃’은 환경영화제가 기획한 디지털 옴니버스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당초 30분 분량의 단편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지만 “도저히 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찍혀” 장편 길이로 늘어나 극장 개봉에까지 이르렀다.저예산 독립 제작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이 작품에는 ‘작가 영화의 복음’으로 불리는 디지털 영화의 장점과 매력이 잘 살아 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이미지를 채집하듯 찍은 작품”이다. 작고 휴대가 간편한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순간 포착의 미덕’을 얻어내려 한 영화의 전략은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졌다. 드라마로는 보여줄 수 없는 캐릭터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포착하는데 디지털 카메라의 순간 포착 테크닉은 상상 이상의 큰 힘을 발휘했다.

‘깃’에서 디지털의 또 다른 장점은 무엇보다 배우의 연기에서 드러난다. 경험이 적은 신인 배우에게 거대한 필름 카메라 앞에서 실수 없이 연기하라는 주문은 그 자체로 부담스러운 일. ‘스캔들 ? 조선남녀 상열지사’에 잠시 출연한 것이 영화 이력의 전부인 이소연이 신인답지 않게 주눅들지 않고 제 기량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언제든 다시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노련한 선배 배우 장현성의 리드에 따라 이소연은 수준급 탱고 실력은 물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특출나게 시선을 끄는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는 없지만 미려한 영상들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7,000만원이라는 헐값에 80분 분량의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죄다 ‘디지털’의 경제성 때문이었다. 제작비의 한계 때문에 최상급의 완성도로 다듬어지지는 못했지만 불과 열흘 만에 찍은 영화치곤 큰 흠결을 찾을 수 없다.

‘깃’은 단지 저예산 독립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홀대할만한 영화는 아니다. 7,0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 디지털 영화지만 이 영화에는 외적 크기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다. ‘깃’은 찌들고 피로한 현대 도시인들에게 잠시 동안 꿈 꿀 수 있는 자유와 휴식을 제공한다. 번쩍 하는 황홀한 로맨스를 격정적인 어조로 예찬하지 않지만, ‘깃’은 만남의 설렘과 여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볼 만한 소품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1-21 09:56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