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지모도의 사랑과 자아찾기수준급의 연주와 배우들의 가창력, 우리 뮤지컬의 수준 엿보여

[문화비평]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
콰지모도의 사랑과 자아찾기
수준급의 연주와 배우들의 가창력, 우리 뮤지컬의 수준 엿보여


디즈니 라이선스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틀담 드 파리’(1831)가 그 원작으로, 소설은 십여 차례에 걸쳐 영화화 되었다. 특히 안소니 퀸과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주연한 영화는 관객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디즈니사는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1996)의 성공 이후 이를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어 1999년 독일에서 초연하였다.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의 작곡자 앨런 맨켄이 심혈을 기울여 음악을 만들면서 음악적 완성도를 자부한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을 이제는 한국 제작진과 배우들(신시뮤지컬컴퍼니)이 디즈니의 인가를 받아 무대에 올린 것이다. 한 편의 공연에 대해 물론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이번 공연을 본 소감은 우리 뮤지컬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해외 공연 팀의 잦은 내한으로 인해 한국관객들의 안목이 높아졌음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배우들의 가창력의 면에서는 어느 것 하나 손색이 없다. 이런 스케일의 음악이 순수하게 우리의 창작물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뮤지컬은 음악과 극의 예술적 결합인 바, 애니메이션을 거친 뮤지컬의 대본이 원작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고 있는지, 음악은 드라마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겠다.

원작의 핵심어인 ‘숙명’
우리에게 소설 ‘레미제라블’(1862)의 작가로 잘 알려진 위고는 당대 최고의 서정시인이자 극작가였으며, 불문학사에서는 극작품 ‘에르나니’(1830)를 통해 낭만주의의 기치를 드높인 이로 유명하다. 미의 엄격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정에 전적으로 호소하는 낭만주의 문학의 시기에 특히 빛을 본 장르는 드라마와 역사소설이다. 과거 역사를 소재로 다루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펼치기가 용이해서였을 것이다.

역사소설 ‘노틀담 드 파리’는 누군가 노틀담 성당 벽에 손으로 새긴 ‘아낭케’라는 글자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 집필 동기가 되었다고 작가는 쓴다. 그리스어로 숙명을 뜻하는 ‘아낭케’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간의 만남과 그로 인해 이들이 맞이하게 되는 파국을 한 마디로 축약하는 핵심어이다. 우주의 섭리인 신을 모신 성당에서 고뇌에 찬 어느 한 인간이 신을 원망하며 새겼을 이 단어의 아이러니는 당연히 상상력을 자극한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에서 이 희랍어 글자를 벽에 새기는 인물은 부주교 프롤로이다.

평생을 신에 귀의하고 살던 그가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를 보고 자신의 내면에 생겨나는 인간적인 욕망을 자신의 유약한 신앙심 탓으로 돌리며 얼마나 갈등했을까! 그도 결국 악인이라기보다는 작가 위고의 눈에는 은총이 부족하여 내면의 진정한 빛을 찾지 못한 ‘가련한 인간들’(레미제라블)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랑을 통한 내면의 발견
뮤지컬에서는 ‘아낭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운명은 여전히 등장인물들을 지배하는 강하고 알 수 없는 힘으로 기능하지만 그 정도가 상당히 약화되어 나타난다. 프롤로, 콰지모도, 페부스는 에스메랄다(정선아 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각자 자아의 낯설고도 진정한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소설에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그랭구아르는 공연에 등장하지 않으며, 공연에서는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해설자의 기능을 집시들의 우두머리 클로팽(김세우 분)이 일인이역처럼 소화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무대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집시의 왕이 되는 장면을 놓친다면 그의 역할에 대해 다소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칭 “그 때를 제일 잘 아는” 그가 해설자로 등장하는 것은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원작에서 소외된 민중을 이끄는 집시의 왕 클로팽의 역할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거나 그 비중이 더 커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번 공연이 새롭게 해석하는 ‘노틀담의 꼽추’의 중추는 선과 악, 미와 추 같은 대립적 요소들의 공존, 지배계층과 소외계층간의 대결, 다양한 계층의 등장인물이라는 극의 소재들 중에서도 꼽추 콰지모도(이진규 분)의 자아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물이나 괴수석상과도 같은 외피 속에서 종루에서 세상과 격리된 채 자라다가 에스메랄다를 보고 처음 인간다운 감정을 느끼고, 인간적인 내면을 찾아가는 콰지모도의 이야기에 극의 초점이 있다. 그것은 원작처럼 20대 초반의 나이로 설정된 콰지모도의 캐릭터, 그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데 일조하는 세 석상들의 존재로 인해서 확연해진다.

성당의 빗물 홈통 장식인 괴수석상들은 애니메이션이 공연에 남긴 영향이기도 한데, 콰지모도가 갈등할 때마다 그에게 충고를 하고 도움을 주는 그의 또 다른 자아들이다. 석상들은 스케일이 큰 이 공연에 유머와 아기자기함을 더하는, 호감 가는 캐릭터들이다. 공연에서는 원전과는 달리 프롤로(김성기 분)가 부주교가 아닌 법무장관으로 설정되어 종교인으로서의 내적 갈등보다는 의무와 욕망 사이의 갈등으로 그 수위가 한층 약화되었다. 페부스(이상현 분)는 의리 있고 멋진 사나이로 설정되어 그의 유머나 바람기로 극의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끈다.

무대장치는 극의 주요 공간을 효율적으로 환기시킨다. 노틀담 대성당의 정면, 종지기 콰지모도의 종루, 종탑에서 바라본 파리 시가의 미니어처 등이다. 집시들의 거주지인 주점 ‘기적의 궁’,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된 노틀담 성당의 내부 등도 입체적으로 무대화된다. 중세 분위기의 소품과 수도사들의 의상, 불타는 건물을 나타내는 특수조명은 인상적이다. 중세의 단성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나 집시의 음악 같은 다양한 원천을 가진 웅장한 음악과 22인조 오케스트라의 유려한 연주, 클래식 발성과 샤우팅 기법을 넘나드는 배우들의 가창력과 콰지모도의 곡 해석력, 특히 배우들의 분명한 대사 전달력이 돋보인다.

다만 음악의 스케일이 크다보니 인물이나 드라마가 그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중세 기독교의 엄격한 종교적 제약에서 일탈을 허용하기 위해 제도화된 민중축제인 ‘바보들의 축제’, 마술, 집시 에스메랄다의 요염한 춤 등 눈길을 끄는 장면들도 기대할 만 하다.

공연장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지난 해 말 대대적 수리를 거친 이후 재 개관했는데 대형 유리벽과 환한 조명으로 외관부터가 훨씬 고급스럽고 좌석도 안락해졌다. 관객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 좀 더 늘어난 것도 개선된 점이다. 같은 원작을 다룬 유시어터의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연극평론’ 2003년 봄호 참조)가 공연된 바 있고, 프랑스 팀의 ‘노틀담 드 파리’가 2월 말 내한 공연할 예정이다.

2004년 12월 23일~2005년 1월 23일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제작 신시뮤지컬컴퍼니 | 번역 · 연출 김철리 | 음악 박칼린 | 작곡 엘렌 멘켄 | 극본 제임스 래핀 | 출연 이진규, 정선아, 고명석, 김성기, 류창우, 이석준, 김세우, 이상현 외 | 공연문의 02-577-1987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5-01-24 16:02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