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바람기, 못말리는 변덕로맨틱 코미디로 그려낸 인간성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시네마 타운] < B형 남자친구>
가공할 바람기, 못말리는 변덕
로맨틱 코미디로 그려낸 인간성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최근 모 국내 기업이 구인 광고가 화제를 낳았다. 신입 사원 채용 조건 중에 ‘B형 남자 사절’이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이 밝힌 B형 사절의 이유는 대인 관계가 원만치 않아 조직 생활에 문제가 있고, 매사에 공공의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

성별, 인종, 종교, 피부색에 의한 차별로도 모자라 이제 혈액형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려는 개탄할 만한 현실 앞에서 만국의 B형 남자들이 통분했지만, 그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핍박은 쉬이 사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공할 바람기와 변덕으로 여자 울리기에도 선수라고 알려진 까닭에 소개팅 기피 대상 영 순위인 그들은 바람 피우는 게 발각되면 제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되려 여자 친구를 몰아세우고 이내 또 다른 작업을 시작하는 구제 불능의 인간으로 낙인 찍혔다.

‘B형 남자 친구’는 이처럼 곁에 두고 오래 사귀어서는 안 될, 상종 못 할 인간의 표상으로 정의된 B형 남자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의 이야기다.

좌충우돌 B형 남자 탐험기
핏줄은 속일 수가 없다더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과연 그런 것 같다.

‘B형 남자 친구’는 A, B, O, AB 네 종류 피의 유형으로 인간을 분류할 수 있다는 다소 허황된 믿음에 기댄 혈액형 분류학을 충실히 따른다. 벤처사업가인 B형 남자 영빈(이동건)과 소심하고 의존적인 A형 여대생 하미(한지혜)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발길에 채일 만큼 많이 깔린 남자들 중에 운명적 상대가 있다고 믿는 하미는 영빈이 자신의 반쪽임을 확신하며 위험한 데이트를 시작한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B형 남자의 성격 연구로 선회한다. B형 남자와 사귀기란 하루 하루가 일희일비이며, 난 코스의 롤러코스터 타기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슈퍼맨 놀이와 환상적인 마술 쇼, 창 밖에서의 사랑의 세레나데 등 다양한 레퍼토리의 이벤트를 쉼 없이 준비해 여자를 감동시키는 타고난 ‘선수’ 근성을 소유한 영빈이지만 여자 친구의 카드를 제 멋대로 긁는가 하면, 수 틀리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 일쑤인 종잡을 수 없는 좌충우돌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B형 남자친구’는 B형 남자를 규정하는 여러 가설들과 소문들을 재료 삼아 소소한 재미를 끌어 내려 한다. 하여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드라마를 위해 쓰여진 대본이라기보다는 혈액형에 따른 행태 탐구 보고서에 가깝다. 혈액형을 주제로 한 책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처용 혈액형 테스트’(처용 설화에 나오는 처용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혈액형에 따라 어떤 다른 행동을 보이는가를 보여주는 테스트) 이야기를 시작으로, B형 남자에게 A형 여자는 ‘밥’이라는 소문,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남자의 괴퍅함에도 불구하고 B형 남자 앞에서 여자는 순한 양처럼 순종형이 된다는 가설도 힘을 얻는다.

이기적인데다가 구속을 싫어하고 제멋에 겨워 사는 게 전부인 것처럼 B형 남자를 묘사하기 위해 영화의 전반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동원한다. 하지만 혈액형 분류학의 가설들을 볼 만한 에피소드로 꾸미는 것 외에 이 영화가 주는 신선함은 없다. 이동건과 한지혜가 연기하는 두 주인공, 단골 조연 배우 신이가 분한 하미의 언니를 제외하면 제대로 각인되는 캐릭터가 없을 정도로 주변 인물들은 스치듯 지나가 버린다. 심지어 영빈의 아버지로 나오는 관록의 중견 배우 백일섭조차 대물림 되는 B형 남자의 행태를 보여주기 위해 도구적으로 쓰일 뿐이다.

무지한 기획영화의 한계
B형 남자의 성격을 닮아, 이 영화 역시 요란하고 제 멋대로이긴 마찬가지다. 영화를 즐기기 위해선 눈 딱 감고 ‘드라마’의 짜임새를 무시하는 수 밖에 없다.

핸드폰을 잘 못 건 두 남녀가 바로 그 순간 거리에서 마주친다는 설정이나, 유년기에 버스 문에 몸이 낀 후 버스를 타지 못했던 영빈이 잃어 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비틀거리며 버스에 올라타는 장면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등의 안이한 해결 방식도 눈에 거슬린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범상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결론짓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한계다. B형 남자의 성격, 행태 연구에 전념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읽는 척하더니 나중에는 B형이든 A형이든 지순한 사랑에는 장사가 없다는 식이다. 이 대목에서 ‘B형 남자친구’는 침 튀기며 설파했던 혈액형의 분류학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다. 아웅다웅 하는 남녀 커플이 수 차례 고비를 넘긴 뒤 마침내 로맨스의 결승선을 통과하고 마는 여느 로맨틱 드라마의 관습에 속절없이 투항하고 마는 것이다.

캐릭터의 개성과 자잘한 에피소드가 주는 재미를 따라가며 보았던 이 영화가 재미 없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지구상의 수십억 인구를 단 네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라는 영빈의 항변을 무시하며 혈액형 결정론을 강조하더니 만인에게 공평한 로맨스의 법칙으로 이야기를 매듭짓고 만 셈이다.

두 말 할 것 없이 ‘B형 남자친구’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계를 휩쓸고 있는 10대 영화 열풍처럼 당대의 트렌드에 영합한 기획 영화다. 혈액형에 대한 갖가지 담론들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기획된 이 영화는 시대의 기호를 읽어내려는 야심보다 로맨틱 코미디의 안전한 성공 공식에 안주하는 편리한 선택을 하고 만다. 무엇보다 혈액형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과정이 드라마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건 치명적인 실책이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혈액형 담론의 뒤에 흐르는 이 시대 대중들의 무의식을 읽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는 보편적인 로맨스 영화의 공식에 편입됨으로써 이 영화는 자신의 ‘핏줄’을 스스로 배반하고 만 셈이다. 이는 애써 만들어낸 B형 남자의 행태가 오로지 영화를 위해 짜맞춘 스테레오타입의 조합이었음을 자인하는, 돌이킬 수 없는 자승자박의 함정이었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2-17 14:22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