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들이는 정신과 언어의 힘말기 암 환자의 마지막 삶으로 반추해낸 인생과 죽음에 대한 성찰

[문화비평] 윤석화의 <위트>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신과 언어의 힘
말기 암 환자의 마지막 삶으로 반추해낸 인생과 죽음에 대한 성찰


‘위트’는 ‘난타’의 PMC 프로덕션이 기획한 ‘여배우 시리즈’ 중 첫 번째 공연이다. 관객은 앞으로 일년에 걸쳐 강남 학동 사거리(구 키네마 극장)에 자리한 우림 청담시어터(293석)에서 윤석화, 김성녀, 손숙, 김지숙, 양희경, 박정자의 공연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위트’ 첫날 공연부터 가득 찬 객석은 이 시리즈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보여준다.

‘위트’는 미국 극작가 마가렛 에드슨의 처녀작(1991년)으로 비상업적 소극장의 대명사인 오프브로드웨이에서 1995년 초연된 후 1999년 퓰리처 드라마 상, 뉴욕 드라마 비평가 상 등을 수상했다. ‘위트’는 말기 난소암 환자인 50세의 영문학자 비비안 베어링이 죽음에 이르는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여 준다. 분명 그 분위기가 암담해야 마땅할 이 극의 제목이 ‘위트’인 것은 의외일 수도 있겠다.

죽음에 대적하는 언어의 ‘위트’
말기 암 환자의 마지막 삶은 그것이 누구의 것이건 간에 고통스럽고 치열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 환자가 일생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해 온 영문학자라면, 게다가 그녀의 전공이 죽음에 대해 가장 깊은 성찰을 했다는 소위 형이상학파 시인 존 던이라면 어떨까? 연구에 시간을 바치느라 사교성이나 인간미가 부족했던 교수 비비안은 투병을 하면서 자신을 일개 실험 대상으로 여기는 의사들을 통해서 지성보다는 인간적인 것이 절실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교수 시절 강의 시간에 학생들을 몰아 세우던 자신을 반성하고, 이렇다 할 친분을 만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관객은 인간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된다.

‘위트’는 기지를 뜻하는 수사법으로, 남의 의표를 찌르는 재치 있는 말을 하는 능력이다. 유머와 비교할 때 자신의 지혜를 뽐낸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냉담성이 시사된다. 비비안의 전공인 존 던(1572~1632)은 인간 정신의 까다로운 퍼즐을 위트를 사용해 구현한 ‘홀리 소네트’(1633-35)의 저자이다. 비비안 또한 존 던의 시구가 가진 언어의 힘을 빌려 죽음에 대적하려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녀는 ‘홀리 소네트’에서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걸듯이 “죽음은 더 이상 없으리니,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라고 외친다(“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이 싯구는 극에서 주인공이 수 차례 반복하는, 극의 화두이다. 주인공은 비록 육신은 죽더라도 정신만은 소멸하지 않을 것임을 확언하고자 한다. 비록 죽음과의 투쟁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 과정의 치열함만은 죽음의 절대적 엄중함에 못지않다. 고통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명민한 의식을 가지고 그녀는 죽음에 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대한 서재는 그녀의 정신세계의 강인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투병중의 비비안이 관객에게 들려주는 영시 강의는 현학적인 즐거움을 준다. 강의 장면에서 무대 뒤 벽 전체가 시의 문자 영상으로 채워지는 장면은 시각적 이미지의 면에서 단연 압권이다. 그림책에 나오는 “졸음을 야기하는(soporific)”이란 단어에서 문자의 힘에 대한 외경심을 처음 느꼈던 다섯 살 소녀는 언어의 소중함을 신봉하고 그 아름다움을 해독해내는 문학의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언어에 매료되지 않는다면 언어의 구조물인 문학에 대한 애정은 불가능하다.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교수 비비안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불가능함을 체험하지만, 강한 정신력과 시의 힘으로 죽음의 상황을 의연히 극복하는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을 감동시킨다.

거리 두기, 연기에서의 위트
1974년 데뷔 이후 ‘세 자매’, ‘바다의 여인’(2000년) 등에 출연한 연기 인생 30년의 윤석화는 첫 날 공연에서부터 전력투구하는 열의를 보여 준다. 항암제 후유증을 겪는 환자를 연기하기 위해 娃덫옇떪謀舊?않았다. 극은 모노드라마가 아니지만 그녀가 소화하는 대사의 분량이나 연기의 비중은 모노드라마에 필적한다. 2시간여의 공연 동안 거의 쉴 틈이 없다. 윤석화가 출연한 어떤 공연들에서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극의 공간은 주로 주인공이 투병하는 암 병동으로 설정되고, 빈 무대에 울려 퍼지는 콘트라베이스 선율은 주인공의 유동하는 감정 상태를 청각적 이미지로 전달한다.

연기의 면에서 ‘위트’의 특이한 점은 배우가 등장 인물과 거리를 두고, 인물을 구현하기보다는 제시하는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적인 ‘거리 두기’ 또는 ‘소외 효과’를 염두에 둔 이런 연기 방식은 관객이 등장인물의 상황에 몰입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켜보게 함으로써 감정 이입보다는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관객으로서는 강한 정신력으로 투병하는 암 환자의 고통스러운 말로를 지켜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거리 두기’는 연기의 관점에서 연출가가 의도한 ‘위트’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극이 시작되고 비비안이 등장하면서 관객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거나(“안녕하세요? 오늘 저녁 기분이 어떠세요?”) 자신의 상황을 설명(“이 연극이 끝날 때 쯤 나는 죽어요.”)하면서 이 공연이 어디까지나 연극임을 드러내거나, 배우로서가 아니라 해설자로서 상황을 해설하는 장면, 무대 위에서 배우가 의상을 바꾸고 다른 역할로 이행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극적 환상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인 소란스런 음향 등이 그러하다.

‘위트’는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참된 모습을 가감 없이 연극을 통해 그려낸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죽음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위트’는 수도사가 해골을 두고 명상에 잠겨 있는 그림에 나와 있는 문구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상기하라)!’의 연극 버전임 셈이다. 여기에 이 연극의 ‘위트’ 또는 아이러니가 있다. 관객은 ‘카르페 디엠(오늘을 붙잡아라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제어)’으로 이에 화답하실 일이다.

아울러 세종문화회관에서 3월 20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소개하고 싶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예술적으로 압도하는, 뮤지컬의 가능성을 한 차원 높인 공연이라고 하겠다. 배우의 가창력과 무용수의 기량이 빼어난, 무대의 역동성과 시가 어우러지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공연이다. 샹송의 후렴구가 반복적인 것이 다소 흠이긴 하지만. 공연 홈페이지에서 가사 내용을 미리 알고 가시면 아름다운 무대를 좀 더 편하게 관람하실 수 있다.

때 2005년 2월 11일~3월 27일 곳 우림 청담 시어터 원작 마가렛 에드슨 연출 김운기 출연 윤석화, 원근희, 윤정자, 진경, 김지홍, 최석준, 성기욱 문의 02-569-0696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5-03-08 19:44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