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9단이 날린 감동의 펀치절정에 달한 원숙한 연출력, 노장들의 관록 돋보이는 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시네마 타운] 영화 9단이 날린 감동의 펀치
절정에 달한 원숙한 연출력, 노장들의 관록 돋보이는 영화


바둑에서 가장 높은 고수의 경지에 도달한 프로 9단을 ‘입신(入神’이라 부른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신의 문턱까지 다다랐다는 뜻인데, ‘입신’을 이룬 고수는 바둑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에 그런 경지가 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공로상을 받아도 충분한 나이에(미국 나이로 74세, 우리 나이로 76세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척척 받아내는 이스트우드의 노익장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지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던 로빈 윌리엄스가 그 보다 스물 두 살이나 어리다는 걸 떠올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터.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일흔을 넘긴 후, 한층 원숙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스트우드의 연출력이 정점에 달한 영화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 지는 예술적 비전과 달리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점점 비관적이 돼 간다. 유년기의 상처가 절친했던 네 동무의 운명을 비극으로 뒤바꿔 놓는 ‘미스틱 리버’에 이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도 비탄과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입신이 수졸에게
바둑 얘기를 한 번 더 하자면 이제 막 프로에 입문한 애송이를 ‘수졸(守拙)’이라 부른다. 이제 겨우 제 한 몸 지킬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주인공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입신이라면 또 다른 주인공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수졸이다. 영화는 입신이 수졸에게 들려 주는 인생 이야기다.

손님이 남긴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빈한한 삶을 사는 웨이트리스 매기는 지혈사 출신의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를 찾아가 지도해 줄 것을 청한다. 프랭키는 ‘여자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앞세워 매몰차게 매기를 내치지만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도장 관리인 스크랩(모던 프리먼)은 남몰래 그녀의 훈련을 돕는다. 스크랩의 도움으로 불철주야 연습에 매진하는 매기의 열정에 감복한 프랭키는 마침내 그녀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인다. 제리 보이드의 자전적 소설 ‘불타는 로프: 코너의 이야기들’을 각색한 폴 해기스의 시나리오는 깊은 맛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트우드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사를 찾아갔을 때, 반응은 한결 같이 시큰둥했다. 철 지난 복싱 이야기에 여성 복서와 트레이너의 세대를 뛰어 넘은 우정이라니! 고루하고 식상해 보일 만도 했다.

더군다나 이스트우드는 ‘승리’를 예찬하는 감격적인 스포츠 드라마를 만들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후 이스트우드는 39일 만에 저예산으로 영화를 완성한다는 조건을 달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화의 제목인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1센트 가게에서 백만불 가치를 지닌 물건을 발견한다는 뜻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귀한 상대를 만났을 때 쓰는 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는 바로 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가치로 표현된다. 매기에게 프랭키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고, 프랭키에게 매기는 혈육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또 프랭키에게 스크랩은 씻을 수 없는 부채 의식의 원천이며, 스크랩에게 프랭키는 친구 이상의 존재다.

표면적으로 복싱 영화처럼 보이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완전한 세계에 대한 이상, 사라져 가는 인간들 사이의 신실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인간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어 졌으며 불가능한 이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를 통해서 잠시나마 꿈꿀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교감은 ‘모쿠슈라’(프랭키가 매기를 부를 때 하는 말로, 결말을 통해 그 뜻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라는 아일랜드어를 통해 상징적 의미를 부여 받는다.

상실한 '퍼펙트 월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여느 영화 같았다면 벌써 뒷전에 나앉았을 ‘노인 드림팀’의 멋진 합작품이다. 주연ㆍ연출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74세), 쇳소리가 나는 중후한 저음의 흑인 배우 모건 프리먼(67세), 촬영 감독 톰 스턴(57? 미술 감독 헨리 범스테드(89세), 30년간 이스트우드와 동고동락한 편집 기사 조엘 콕스(61세)까지 노장들의 관록은 눈이 부시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 이어 아칸소주 출신의 선머슴처럼 우직한 여류 복서 매기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두 번째로 제패한 힐러리 스웽크는 3개월 동안 하루 4시간 30분씩 훈련하면서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복서의 몸을 만들었다. 본인이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언제나 회한에 젖은 늙은 남자 역할을 맡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랭키가 매기를 바라보는 태도 역시 반성과 후회의 시선이다.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지만 프랭키와 매기는 아버지와 딸처럼 보인다. 프랭키는 매기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한 발 물러서서 주먹을 내밀어라”, “터프함으로 충분치 않다”, “너 자신을 먼저 보호하라” 등등.

하지만 왼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매달아 가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 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기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 한다. 실수를 저지르는 건 프랭키도 마찬가지다. 농익은 기량을 가진 선수에게도 좀처럼 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주선하지 않은 외고집 때문에 많은 문하생을 떠나보냈던 그는 완고함을 버리고 매기에겐 기회를 준다. 하지만 방심한 순간, 비극은 찾아온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감동에는 깊은 공명이 있다. 이스트우드는 인생은 아주 잠깐 행복하고 길게 불행하다는 아픈 진실을 깨닫게 하면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한다. 완전무결한 세상을 보았고 꿈꾸었던 천사 매기는 동정 없는 세상의 공기에 질식돼 날개를 꺾고 만다.

중반 이후부터 극장 안은 눈물 바다가 되지만 이스트우드는 약해진 감정을 자극해 어설픈 눈물을 구걸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지금도 미국에서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건 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싹쓸이한 이 영화가 당신의 눈물도 싹쓸이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3-17 13:56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