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타운] 박광춘 감독

위장 취학한 열형 여형사의 좌충우돌 난장 한마당사건 해결 위해 학생으로 위장, 북치고 장구친 '김선아표' 코믹 액션

만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에 간 조폭이 범죄 해결을 목적으로 고등학교에 잠입한 강력계 형사로 바뀌었다면? 도덕적으로 문제 없고 싸움 잘 하며, 경제력이 받쳐 주는데다 사회 경험까지 풍부하니 방종한 아이들의 세계를 평정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 ‘잠복근무’의 여형사 천재인(김선아)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폭력 조직 소탕을 위해 학생으로 위장 취학하고 있는 그녀는 고삐리들과의 티격태격으로 시간을 허송할 여유가 도무지 없어 보인다. 극악한 범죄 집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여고생 신분으로 위장 잠입한 여형사의 좌충우돌 대활약. ‘잠복근무’는 이 충분히 코미디적인 상황을 끌어와 웃음과 액션의 한 판 난장을 꾸미려 한다.

웃음과 액션, 쾌감의 도가니 속으로
‘잠복근무’는 형사판 ‘두사부일체’이며 여자판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성공한 코믹 액션 장르의 계보를 잇기 위해 분투하는 영화는 익숙한 장르의 법칙을 버무린다.

주인공 천재인은 물 불 안 가리는 열혈 여형사다. 사건 해결을 위해서라면 몸까지 팔 수 있는(?) 투철한 임무 수행 능력을 갖춘 그는 조직에 불리한 증언을 한 후 쫓기고 있는 배두상파 넘버2 차영재(김갑수)의 신변 확보를 위해 차영재의 딸 차승희(남상미)의 학교에 학생으로 잠입한다.

친분을 쌓아야 하는 승희의 마음은 냉담하고 배두상파의 마수는 옥죄어 오고 일진회 아이들은 상황 파악 못하고 엉겨 붙으니, 재인의 잠복 작전은 고생 길이 훤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흠모의 대상인 꽃 미남 박노영(공유)은 수상한 행동을 계속해 재인의 애를 태운다.

줄거리만 보더라도 ‘잠복근무’는 예상할 수 있는 경로대로 흘러가,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모로 보나 여고생으로 보이지 않는 여형사의 학교 생활 적응기로 웃음을, 간악한 범죄 집단과의 한 판 대결로 액션의 쾌감을 끌어 내려는 영리한 양동작전을 구사하는 것이다. ‘잠목근무’는 김선아의 스타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김선아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녀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 김정은과 더불어 충무로에서 코미디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여배우로 꼽히는 김선아의 재기와 애드립을 이 영화에서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거의 혼자서 영화를 끌고 가다시피하는 그녀는 ‘위대한 유산’ ‘에스 다이어리’로 형성된 세간의 편견마저 불식시키려 고군분투한다. 그저 웃기기만 한 배우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숭 떨지 않는 넉살 좋은 언행과 발랄한 표정, 좌충우돌 개그는 물론, 고난도 와이어 액션과 멜로, 마지막엔 감동의 눈물 연기까지 스크린이 좁게 느껴질 정도의 열연이다. 될 수 있는 한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액션 연기를 한 그녀는 “나중에 액션 영화를 찍게 되면 유용하리라는 생각에 배워뒀다” 이소룡의 쌍절권이나 태보 실력 등에서 수퍼 우먼급 활약을 펼친다. 웬만한 남자 배우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그녀의 헌신 덕분에 전반부는 넋 놓고 웃을 수 있는 조건들을 두루 갖췄다. 하지만 이 영화가 책임져 주는 즐거움은 김선아의 다재다능함을 전시하는 것, 딱 거기까지다.

중심을 잃고 헤매는 드라마
‘잠복근무’의 연출자는 박광춘 감독. 한국 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로 알려진 ‘퇴마록’과 멜로 영화 ‘마들렌’을 연출한 그는 액션, 코미디, 멜로 등 자신이 거쳐왔던 장르들을 한 데 융합하려는 욕심을 숨기？않는다. 통쾌하게 웃기고 후련하게 부수고 애틋하게 사랑하게 하고 찡하게 울리고 싶은 야심을 일거에 채우려는 것이다.

여형사가 학교에서 겪게 되는 부적응 상황으로부터 자연스러운 웃음을 끌어내던 드라마는 증인 보호 임무, 미스터리한 꽃미남 청년과의 로맨스, 재인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얽히는 가족애 등으로 문어발 확장을 하면서 중심을 잃기 시작한다. 잔재미를 위해 이야기의 가지를 칠 수는 있지만 나중에 가면 학생으로 잠입한 여형사의 곤경에 찬 학교 생활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극악한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그녀의 활약을 따라가려는 건지, 그도 아니면 선머슴 같은 여경찰의 로맨스를 이뤄주고 싶은 것인지 갈팡질팡이다. 두 시간에 육박하는 상영 시간 동안 감독은 자신의 속내에 잠복해 있던 이야기들을 꾸역꾸역 꺼내 모두 보여 주려는 만용을 부린다.

그 욕심 때문에 영화가 소화 불량에 걸린 형국이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출연진으로도 이는 충분히 짐작된다. 김선아, 공유, 남상미로 구성된 주연급 배우 외에도 노주현, 김갑수, 박상면, 오광록, 하정우 등의 조연, 카메오로 얼굴을 내미는 이범수, 최불암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의 호화 진용. 그러나 적절한 캐스팅이라기보다 낭비처럼 보인다.

영화는 추수가 아니다.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수 년 간 씨름 했을 감독은 한 톨의 쌀알이라도 거둬 들이고 싶은 농부의 심정이겠지만 힘겹게 이어오던 이야기의 논리를 붕괴시키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곤란하다. 한국 캐릭터 코미디의 해묵은 병폐, 즉 인물과 사건, 이야기를 엮어내는 매듭의 헐거움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맺기 위해 이야기의 논리를 흐트리고 유행에도 뒤쳐진 로맨스를 삽입하는 것은 괜찮은가? 제작사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기발한 소재로 유혹하는 기획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웃고 즐기는 사이 관객들은 드라마의 비논리성과 엉성함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구처럼 지내던 절친한 선배가 갑자기 배신을 하고, 죽은 줄 알았던 삼촌이 부활하는(?) 따위의 어설픈 반전은 한국 코미디의 고질병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저 즐기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보더라도, 파렴치한 영화의 결말을 용서하기는 힘들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해묵은 교훈이 다시 한 번 새겨지는 순간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3-28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