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 꽃터널에서 봄의 아우성에 취한다벚꽃·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핀 호숫길소박한 남도의 정취로 가득한 드라이브 코스
[주말이 즐겁다] 순천 주암호 호숫가 꽃터널에서 봄의 아우성에 취한다 벚꽃·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핀 호숫길 소박한 남도의 정취로 가득한 드라이브 코스
꽃샘 추위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봄은 오고야 말았다. 4월! 가슴 설레는 이 달에 들어서면 벚꽃이며 진달래 같은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며 산하는 하루가 다르게 봄빛으로 물들어 간다. 섬진강의 가장 큰 지류인 보성강 물줄기를 막으면서 생긴 순천의 주암호는 남도의 호수답게 따사로운 봄볕이 넘쳐나는 곳이다.
한국불교 중심도량 송광사·선암사 사하촌을 지나 산벚꽃 연분홍 이파리 휘날리는 길을 얼마쯤 걸어 오르면 일주문이다. 그 돌계단에서 반가사유상처럼 한쪽 팔을 턱에 고이고 깊은 생각에 잠긴 자세로 앉아있는 돌사자는 가슴 설레는 봄날에도 한치 흔들림 없이 삼매경에 빠져 있다. 높은 경지가 엿보인다. 송광사(松廣寺)는 신라 말기에 혜린선사가 길상사(吉祥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나라의 지원을 받아 중창한 후 수선사(修禪寺)라 고쳐 불렀고, 당시 여러 불교 사상을 재정리하여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후 지금의 송광사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 후 보조국사를 1세로 해서 진각국사, 청진국사 등 16분의 국사가 송광사에서 배출되어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 사찰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한국 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잡았다. 경내에는 이들 16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이 따로 있다.
송광사는 창건 후 여러 번의 화재를 겪었다. 20세기 중반에도 여순사건과 6ㆍ25 전쟁을 겪으면서 많이 불탔으나 1980년대까지 건물들은 대부분 복구됐다. 그래도 오랜 역사와 승보 사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귀한 유물과 유적들을 아주 많이 간직하고 있다.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제43호), 국사전(국보 제56호) 같은 국보 3점을 비롯해 대반열반경소, 금동요령, 묘법연화경, 약사전, 영산전 등 10여 점의 보물들이 있다. 이 밖에도 추사 김정희의 서첩(書帖), 영조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재가 사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느 절집이라면 한두 점 있게 마련인 석탑이나 석등 같은 석조물이 송광사 경내엔 없다. 풍수지리로 보면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에 불(火)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불의 형상인 석등을 세우지 않은 것이라 한다. 또 이 같은 이유로 일주문이나 송광사 경내의 목조건물들 계단에 불의 기운을 제압한다는 사자를 돌로 조각해서 배치한 것이다.
고인돌공원·서재필 박사 기념공원
고인돌공원은 18,000평의 대지에 야외 전시장, 유물 전시관, 묘제 전시관 등을 꾸며놓았다. 야외 전시장엔 고인돌 140여기와 선사 시대 움집 6동, 구석기 시대 집 1동, 남북 방식 모형 고인돌 5기를 비롯해 솟대와 선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유물 전시관에는 고인돌에서 출토된 비파형 돌검, 돌화살촉, 돌칼 등 석기류와 붉은 간토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라남도 지방의 묘제를 시대별로 고증해 놓은 묘제전시관은 영상실도 겸하고 있다.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진달래꽃 구경을 하며 산책하기 좋은 오솔길이 나있다. 주암호 기슭에서 이 고인돌공원과 함께 우리가 살펴봐야 할 곳이 바로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ㆍ1864~1951)박사의 기념 공원이다.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서재필 박사의 얼과 호국 정신을 기리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덕면 용암리 가천 마을의 생가 부근에 지었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외갓집인 생가, 그리고 똑같은 크기로 복원한 독립문이 눈길을 붙든다. 유물 전시관에는 그의 유품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개화파로서 갑신정변의 중심에 있었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3ㆍ1운동 때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전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치기도 한 서재필 박사는 지금은 호수로 변한 보성강 물줄기를 굽어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난의 시기를 우국충정으로 살다가 끝내 타의로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서재필 박사. 그는 1951년 85세의 파란 많은 생을 마친 뒤 이국의 공동묘지 납골당에 쓸쓸히 안치되어 있었는데, 1994년에야 고국으로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입력시간 : 2005-04-06 17:43
|
글ㆍ사진 민병준 여행 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