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벽에 몸부림치는 언저리 인생들의 울분전직 복서의 절박한 인간애와 애환, 최민식·류승범 연기에 매료

[시네마 타운] 류승완 감독 <주먹이 운다>
현실의 벽에 몸부림치는 언저리 인생들의 울분
전직 복서의 절박한 인간애와 애환, 최민식·류승범 연기에 매료


TV 다큐멘터리가 충무로의 아이템 저장 창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에 간접적으로 소재를 제공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류의 역사 회고 프로그램 뿐 아니라 최근에는 <말아톤>의 소재가 된 <인간극장>의 배형진군 이야기, 칠순의 노모가 산을 넘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연을 스크린에 옮긴 <엄마> 등, 인간미 넘치는 휴먼 다큐멘터리들이 영화 아이템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허구적 이야기 보다 현실 속에서 보았음직한 리얼한 이야기가 묵직한 감동과 페이소스를 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영화 제작자들은 죄다 방송 다큐멘터리 모니터 하기 바쁘다'는 농담 섞인 말까지 충무로에서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는 이 같은 다큐멘터리 실화 붐을 타고 기획된 영화다.

이 영화는 MBC <생방송 화제집중 6시>에서 방송된 전직 복서 출신 일본인 하레루야 아키라 씨의 사연과 SBS <휴먼 TV 아름다운 세상>을 통해 알려진 소년원 출신 복서로 현재 이종격투기 선수로 뛰고 있는 서철의 이야기를 토대로 드라마를 꾸몄다. '액션 스타일리스트', '시네 키드' 등으로 불리며 한국영화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으로 꼽혔던 류승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장풍대작전>)은 전작에서 보여준 현란한 액션의 쾌감보다 살과 주먹이 맞부딪히면서 느껴지는 질박한 인간애에 초점을 맞춘다.

기구한 운명에, 주먹이 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눈물은 눈에서만 흐르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되새겨진다. 빽 없고 돈 없고 가방끈 까지 짧은 언저리 인생들은 가끔씩 이렇게 내지른다. "으~ 주먹이 운다."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울분이 되어 토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건 돈으로도 사회적 지위로도 배경으로도 차별 받지 않을 수 있는 주먹 뿐. <주먹이 운다>의 두 주인공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기구하기로 치자면 그들보다 더한 이들도 많겠지만 이 두 남자의 이야기는 가슴을 치는 구석이 있다.

온갖 비행을 일삼으며 아버지와 할머니의 속을 썩힐 대로 썩힌 인간 말종 류상환(류승범)과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복싱 경기에서 은메달 딴 걸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광장에서 맞아주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 퇴물 복서 강태식(최민식). 링 위에서 악행의 자서전을 쓰며 참회하려는 상환과 유일하게 가진 주먹 하나로 못다 한 남편 노릇, 아비 노릇하기로 작정한 태식.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두 남자는, 한 발짝도 물러설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맞닥뜨린다. 어느 모로 보나 둘은 실패한 잉여 인생들이다.

복역 중 아버지를 여의였고 할머니마저 치매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상환은 꼭 신인왕이 돼 할머니의 주름살을 펴드려야 하고 왕년의 명성 만을 뇌까리며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부인에게 이혼 종용까지 당한 태식은 죽거나 혹은 까무러칠 각오로 글러브 끈을 조여 맨다. 누굴 응원하겠느냐고? 아무려나, 이건 처음부터 누가 이기는가는 중요하지 않는 게임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인생들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링 위에서 사투를 벌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은 싸웠으니 군가는 이겨야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류승완의 전작들처럼 이 영화 역시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된 두 남자의 운명적 대결을 다룬다. 이들에게 '주먹'은 마지막 한 줌 남은 자존심, 버리고 싶지 않은 희망이다.

<주먹이 운다>는 불가피하게 주먹을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 자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통해 달콤 쌉싸름한 인생의 맛을 걸쭉하게 우려낸다. 초년병 시절의 치기를 과감하게 버린 류승완은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공감?폭이 큰 인간 드라마를 완성했다.

절묘한 연기에, 관객이 운다
<주먹이 운다>는 무엇보다 배우들의 영화다. 현역 최고의 연기파로 꼽히는 최민식과 향후 최고의 배우가 될 재목으로 기대되는 유망주 류승범의 동반 출연은 제작 전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다.

신인왕전 결승 경기를 찍으면서 두 배우는 진짜로 주먹을 교환하며 실제 싸움을 벌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주먹을 날렸고, 맞지 않기 위해 상대를 때렸으며 서로를 밀치며 ‘진짜로’ 욕을 했다. 그 가공하지 않은 생생함이 영화 속에 살아있다. 특히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야수적 연기를 보여주는 류승범의 에너지는 대단한다. 몰라보게 달라진 근육질의 몸과 피나게 연마했음직한 날랜 복싱 실력 보다 더 돋보이는 건 상대를 잡아먹을 듯 살기등등한 눈빛과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다. 처음에는 그 눈이 무섭다가 나중에는 가련하게 느껴진다.

<주먹이 운다>는 처음부터 류승완의 장기이자 한계로 지적됐던 본격 액션 영화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교한 장르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싱 장면의 사실감만은 살아 있다. 될 수 있는 한 편집하지 않고 길게 찍기로 보여주는 복싱 장면은 현란한 테크닉과 강펀치가 작렬하는 쾌감 넘치는 이미지로 구성돼 있지 않다.

화려한 볼거리에 대한 욕심을 버린 이 장면에선 도망갈 곳 없는 사각의 링에서 살아 남기 위해 피를 흘리며 엉겨 붙는 수컷들의 모습들만이 화면을 채울 뿐이다. 삶의 비극성과 인간에 대한 희망이 어울린 이 영화를 통해 류승완은 비로소 세상을 굽어보는 묵직한 시선을 얻은 듯 하다.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았고 지지리 복도 없는 인생들이지만 류승완은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바닥으로부터 질긴 삶의 의지를 끌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빈한한 막장 인생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두 남자의 처절한 마지막 대결까지를 보고 나면 끝을 각오한 그들의 삶도 비참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4-06 18:33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