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티시즘의 위대한 승리인생역전 필을 꽂은 퇴물 테니스 선수의 '사랑 스매싱'

[시네마 타운] 웰메이드 스포츠 영화<윔블던>
로맨티시즘의 위대한 승리
인생역전 필을 꽂은 퇴물 테니스 선수의 '사랑 스매싱'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스포츠와 영화는 사랑의 매체”라고 말했다. 선호하는 장르나 좋아하는 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관객의 심리와 특정한 팀이나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관중의 심리가 유사하다는 말이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때는 응원하는 팀이 승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스릴을 만들고 탄성과 흥분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스포츠 영화는 어떨까?

할리우드에서 각광 받는 장르인지 모르지만 ‘스포츠 영화는 장사가 안 된다’는 게 한국 영화계의 유서 깊은 징크스. 할리우드에서 아무리 크게 성공한 스포츠 영화도 한국에선 맥을 못 추고 패퇴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윔블던’은 이 같은 뿌리 깊은 편견에 도전할만한 잘 만들어진 스포츠 영화다.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 타이틀(‘노팅 힐’ ‘어바웃 어 보이’ ‘러브 액츄얼리’)이 두 팔을 걷어 부쳤으니 재미는 떼 논 당상이다.

게임과 로맨스의 영리한 랠리
‘윔블던’의 러브 스토리는 세기의 테니스 스타 커플로 화제를 모은 안드레 애거시와 슈테피 그라프 간의 로맨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나 세계 랭킹 100위 밖까지 밀려났던 애거시가 연인 그라프를 만난 후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재기에 성공한 사연은 테니스 코트를 달군 세기의 로맨스로 회자되고 있다.

전세계 강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메이저 테니스 대회 윔블던에서의 우승은 모든 테니스 선수들의 꿈이다. ‘윔블던’은 이 꿈의 무대인 윔블던 대회를 배경으로 또 다른 꿈의 실현인 러브 스토리를 펼쳐 보인다. 주인공 피터 콜트(폴 베타니)는 한 때 잘 나갔으나 지금은 한물 간 퇴물 취급을 받는 세계 랭킹 119위의 평범한 테니스 선수. 전성기를 지나 선수 생명의 끝에 다다른 피터는 곧 벌어질 윔블던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심하고 있던 차다.

하지만 때로 슬럼프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피터 앞에 사랑의 전령사가 도착했으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던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리지 브래드버리(커스틴 던스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난 같은 만남이려니 했다가 흠뻑 빠져 버린 두 사람. 영묘한 사랑의 힘이 발동했음인가. 기라성 같은 강호들을 제치고 피터는 결승전에 진출하는 사고를 치고 만다. ‘윔블던’은 ‘노팅 힐’을 계승한 남자 신데렐라 스토리 또는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다.

선남선녀 로맨스는 토너먼트 경기에서 승승장구하며 우승까지 거머쥐는 피터의 활약과 병치된다. 강자들을 차례로 제치고 결승전에 오르는 과정과 로맨스를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이 대위법적으로 어울리며 상승 효과를 일으킨다. 정신없이 공을 주고 받는 테니스 시합의 긴 랠리를 보는 듯한 리듬으로 시합의 긴장감과 로맨스의 긴장감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와 로맨스를 황금 비율로 조합하는 세련된 솜씨는 모범적인 대중영화의 화술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리지와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과거의 실력을 회복하는 피터와 이와 반대로 사랑에 한 눈을 팔아 시합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리지 사이의 갈등은 후반부 드라마의 중심 축이다.

게임과 사랑을 조화시키는 피터의 승리로 맺어지는 영화는 경쟁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사랑과 우정은 함께 풀어 가야 할 숙제라는 걸 넌지시 가르쳐준다.

경쾌하고 신선한 영상 돋보여
‘윔블던’의 영상은 신선하고 경쾌하다. 실제 경기?보는 듯한 경기 장면은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 자체 보다 재미있지 않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폴 베타니와 커스틴 던스트는 윔블던 챔피언 출신 테니스 선생에게 4개월 간 폼 위주로 사사를 받았다. 중계 방송용 카메라 외엔 어떤 촬영 장비도 들여 보내지 않았던 윔블던의 완고한 전통을 깨고 대회 기간 동안 7주간 촬영 허가를 받아낸 것도 결정적인 힘이 됐다.

제작팀은 2003년 윔블던 대회가 열리는 기간을 활용해 촬영을 진행했고 하이라이트인 결승 장면은 영국 출신 테니스 선수 팀 헨만과 프랑스 선수 마이클 로드라가 격전을 벌인 바로 그 장소에서 찍었다. 피터와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미국인 선수가 맞붙는 10여분 간의 이 피 말리는 결승전 장면은 대단한 박진감을 뿜어낸다.

피나는 연습을 하더라도 배우들이 테니스 선수처럼 공을 칠 수는 없는 법. 이들의 노력을 완성시킨 건 CG의 마술이었다. 구름처럼 경기장을 메운 실제 관중들 앞에서 배우들은 허공에 대고 라켓을 휘두르고 그 위에 CG로 공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피터 역을 맡은 폴 베타니는 “전세계 테니스 팬들의 시선이 쏠린 그 자리에서 머저리처럼 쇼를 하고 있다니, 죽을 맛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CG의 힘을 빌어 창조한 영상이지만 서브와 발리, 패싱, 로브, 스매싱 등 다양한 테니스 기술들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히 재현된다. 프로들의 세계를 다룬 이런 로맨스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이다. 결승전에서 패배 직전까지 몰린 피터에게 리지가 “상대가 서브를 넣을 때의 습관을 관찰하면 공이 어디로 올 지 알 수 있다”고 훈수하는 장면은 전문가들의 세계에서만 엿볼 수 있는 인생에 대한 교훈을 보여준다.

영국을 대표하는 피터가 미국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결말은 홈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윔블던 대회에서 허구한 날 미국 선수에게 우승 트로피를 넘겨 주어야 하는 영국인들의 한과 응어리를 속시원히 풀어주기도 한다. 그 외에도 피터와 리지의 신분의 벽을 허문 사랑만큼이나 감동을 주는 것은 연습 상대인 친구와의 도타운 우정, 마음 속으로 피터를 응원하는 볼 보이 소년과의 교감, 한 번도 형에게 내깃 돈을 걸지 않았던 피터 동생의 형제애를 확인하는 순간 등이다.

세계 랭킹 119위 선수의 믿기지 않은 우승이라는 소재는 극적이지만 어찌 보면 진부한 사건이다. 이 영화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랑은 허튼 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복할 수 있는 힘때문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4-13 15:47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