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꽃내음에 봄 밤도 취한다

[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수수꽃다리
청량한 꽃내음에 봄 밤도 취한다

봄은 밤도 아름답다. 눈뜨고 바라 보지 않아도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만 하여도 온통 휘감겨 오는 꽃들의 향기로 더욱 빛난다. 온갖 꽃들의 향기가 다 그윽하지만 가장 청량한 꽃 내음 주인의 하나가 바로 수수꽃다리일 것이다. 대부분 꽃의 향기는 해가 있어야 비로서 동하기 시작한다.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화려한 꽃잎과 진한 향기 그리고 달콤한 꿀은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손을 번성키 위해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노력이므로 꽃 등 대부분의 식물은 곤충들이 활동하는 시간에 맞추어 꽃잎을 벌리고 꿀과 향기를 내보낸다.

수수꽃다리의 향기가 밤에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시선으로 빼앗기는 많은 에너지를 밤에는 고스란히 향기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며, 눈부신 햇살 속에서는 수수꽃다리 이외에도 다투어 피어 나는 수많은 꽃 내음이 온통 뒤섞여 이 꽃의 향기가 빛깔로 느껴지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향기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해 밤까지 이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밤이 아니어도 동네 어느 집 마당에 큰 나무 한 그루만 자라고 있어도 그 맑고 그윽한 향기가 골목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자연의 향기가 더욱 소중하다.

수수꽃다리는 조금은 귀에 선 이름이다. 모두들 라일락이라고 알고 있는 꽃의 우리말이다. 수수꽃다리와 라일락 이외에도 정향나무, 개회나무라고 부르는 꽃나무들이 여럿 있는데 모두 서로 비슷하게 생긴 한 형제 같아 언제부터인가 그저 라일락이라고 한데 어울려 부르다 보니 이제는 이들을 각기 바로 잡아 그 이름을 부르기가 조금 복잡해 졌다. 한마디로 라일락은 서양수수꽃다리이고 정향나무는 중국식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라일락은 중세에 아랍이 스페인 및 북아프리카를 정복하면서 함께 들어가 15세기부터는 유럽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조선 말엽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원예용으로 퍼졌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수수꽃다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자라는 특산 식물이다. 비슷한 여러 종류의 꽃 가운데 특히 수수꽃다리가 꽃과 향기가 풍부하고 아름다워 최고로 평가된다. 수수꽃다리는 남한에서는 자생지를 찾아 볼 수 없지만, 해방 이전에 이미 이 나무의 좋은 점들이 알려지고 그래서 남쪽에 몇 그루 옮겨 심어 놓은 것이 이제 후손을 퍼트려 전국에 퍼져 있다. 나도 대학에 들어와서야 수수꽃다리를 알게 됐다. 수수처럼 많이 달리는 꽃송이와 어울려 이토록 고운 우리 이름을 왜 진작 몰랐을까.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수수꽃다리와 형제나무들을 그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정향나무라고도 불렀고 민간에서는 새발사향나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수수꽃다리 종류의 이름을 사천정향, 홍정향, 화사정향 등으로 꼭 정향이라는 이름을 뒤에 붙여 부른다. 이 정향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고무래 정(丁), 향기 향(香)자를 쓴다. 그 그윽한 향기 향자가 이름에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고무래 정자는 강하다 또는 심하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향기가 짙은 꽃임을 강조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정자는 위가 벌어지면서 아래로 화통이 긴 꽃 모양이 글자 모습과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우리 옛 조상들은 이 꽃이 피면 따서 말려 향갑이나 향궤에 넣어 두고는 항상 방안에 은은한 향기가 돌도록 했으며, 여인들의 향낭에 자주 들어가는 꽃이기도 했다.

라일락은 아랍어에서 기원한 영어 이름이고, 프랑스에서는 리라라고 하는데 특히 유럽에서 인기가 높다. 누구에게나 꽃과 향기가 인상적이어서 많은 시ㆍ노래ㆍ소설에 등장한다. 그 유명한 베사메 무초라는 노래 ‘베사메 베사메 무초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라일락꽃)피는 밤에”에 나오는 것이 바로 이 꽃이다.

누구에게나 봄 밤의 추억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예전 한 선배는 た“?잘 생긴 수수꽃다리 잎새 하나 따서 씹어 보라고 권했다. 한 뼘이 채 되지 않은 정도의 큼직한 잎은 심장형,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모양인데 잎을 씹어 보면 사랑의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씹어보니 몹시 썼다. 사람의 마음을 온통 빼앗는 이 아름다운, 그러나 농익지 않아 소녀와 같은 꽃과 향기를 가진 이 나무의 쓴맛이 곧 다가 올 것 같은 미래의 설레임과 뒤엉켜 몹시 혼란스러웠었다.

이 꽃의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이듯 이제 내게도 이 모든 기억이 수수꽃다리처럼 풋풋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스무 살의 추억이 되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입력시간 : 2005-04-21 16:44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