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범이 아니다문창재 지음일진사 발행ㆍ10,000원

[출판] 철면피한 일본을 고발한다
나는 전범이 아니다
문창재 지음
일진사 발행ㆍ10,000원


따지고 보면 우리 근ㆍ현대사는 각종 원귀들의 한(恨) 마당이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보려는 목소리는 이 정부 들어 옥타브를 높여 가고 있지만, 거개가 한국 영토 안에 머물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 분쟁에 가렸다 보였다 하는 것이 독도 문제다.

이 종잡기 힘든 동북아의 먹장 구름, 그 한 켠에서 들리는 원귀들의 목소리는 아직도 우리를 편히 못 자게 한다. 그들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고 큰소리 칠 수 없을 터다. 언론인 출신으로 10여년째 이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오고 있는 문창재씨가 한국인의 건망증을 단단히 채근하고 나섰다.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 전쟁 때문에 한국인 148명이 전범으로 처벌됐고 그 중 23명은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나아가 생존 피해자들은 철면피한 가해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여전히 그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책은 추진력을 얻는다.

저자가 1990년대 초 한국일보 도쿄특파원으로 근무 중, 태평양 전쟁 재일 한국인 전범 출신자들의 모임인 동진회(同進會) 출신 회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반 백년 넘도록 보상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이 책은 차근차근 씌어졌다. 소송 기록 등 관련 자료를 10년 족히 넘는 세월 동안 섭렵하고 축적해 온 한 기자가 일궈낸 값진 성과다.

사건 현장을 가장 생생히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기자의 권리이자 의무다.이 책은 이를 바탕으로 했다. 그래서 뜨거우면서도 차갑다. 그 뜨거움은 “평생을 정신병원 격리 병동에 갇혀 있다가 외롭게 죽은 어느 전범 출신자를 취재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떨리던 몸”일 수도 있고, “한 인간의 일생을 그렇게 해 놓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미안한 생각도 없는 것 같은”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이기도 하다.

그 같은 대응 방식이 감정적이라고 그 누가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남의 것을 벌건 대낮에 제 것이라고 우겨대는 사람들이 큰소리 치는 것을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말이다. 저자는 포로감시원으로 3년, 누명 쓰고 감옥에서 7년, 그러다 정신병에 걸려 격리 병동에서 40년 해서 모두 50년을 이국 땅에서 고통스럽게 살아 간 한국인의 예를 든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그 죽음을 숨기려 했다. 아니 문상도 영결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고소장도 고발장도 증거도 변호인도 없이 피해자의 손가락질 한 번으로 기소되는 ‘손가락 재판’, 뺨 한 대에 징역 10년이라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감정 재판’의 실태 등을 냉정한 어조로 기술했다. 기자적 시각으로 그 사건들을 기록해 간 저자는 “현대사의 결락을 보완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누락된 미완의 현대사는 독도 문제, 역사 왜곡 등으로 시퍼렇게 살아 동북아를 들쑤시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책은 최근의 상황을 역사적 의미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 독자들을 데려 간다.

기자로서의 미덕이 제대로 발현된 것이라고나 할까. 기자들은 사실(fact)을 가장 중시한다. “팩트(fact) 없다”는 말은 그들에게 치명적이다. 30여년간 기자로 재직한 저자의 글에서 책상물림들의 그것이 주지 못하는 힘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책 말미 20여쪽에 달하는 사실적 자료들, 즉 팩트는 책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준다. 이번에 첫 공개되는 ‘한국인 전범들의 절필 유고’사본이 그것이다.

동료 사형수들이 한 동료 유기 징역자에게 받은 필기구로 쓴 이 글은 펜으로 씌어졌지만 그 잉크는 분명 피였을 것이다. 아래 아 등 고문투가 역력한 편지글 중에는 남방의 풍경에 태극 무늬를 선명히 그려 넣은 것도 있어 후세 인들을 처연한 감회에 젖어 들게 한다. 또 1946년 수감돼 있던 싱가포르의 창이형무소 정문을 침착하게 그려 놓은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 한층 처연해 진다.

그는 왜 그 그림을 그렸을까. 수감 시간까지도 자신의 독립 투쟁으로 산입했던 것일까. 그림 전문가는 아니었을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치욕의 시간들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고맙게도 지은이는 책 제목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나는 전범이 아니다”라고. 저자는 현재 내일신문 논설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5-04-27 14:46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