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해체, 그리고 상큼한 재구성셰익스피어 작품 변용, 연극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현실과 비현실 넘나들어

[문화가 산책] 극단 인터<줄리에게 박수를>
고전의 해체, 그리고 상큼한 재구성
셰익스피어 작품 변용, 연극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현실과 비현실 넘나들어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즐거운 혼돈의 세상일까, 아니면 원칙은 아예 관심 밖인 착종의 공간일까. 여기, 눈물 섞인 웃음, 웃음 묻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햄릿과 줄리엣, 로미오와 오필리어의 사각 관계가 있다. 엄정한 고전의 틀을 부순 재구성과 해체의 세계에 우리 시대의 이야기까지 개입하니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그것을 극단 인터는 ‘줄리에게 박수를’이라고 명명했다.

1년 전 초연돼 대학로를 달구었던 연극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견 어설픈 듯, 그 어설픔 까지도 의도된 듯, 극은 대단히 포스트모던하게 우리 시대 객석을 풀었다 죈다. 더욱 능란해진 원작의 해체와 변용술은 고전을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다.

만혼이 시대 추세인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주인공들의 극중 나이가 한 층 높아졌다. 햄릿 30대 초반, 로미오 20대 중반, 오필리어 27세, 줄리엣 28세 등이다. 여기에다 여성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인 페미니즘의 원칙까지 알게 모르게 가세했다. 우리 말의 맛을 능란히 구사하는 것으로 성가 높은 극작가 박수진(34)은 셰익스피어를 이렇게 재구성했다.

이 극은 현실과 비현실(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극중 현실)을 오가며 진행된다. 1597년에 발표된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1601년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와 장면을 적절히 인용하며 여러 세계를 드나든다. 그 둘을 묶는 것이 지금 바로 이 곳이다. 우유 배달을 하며 연극을 하고 있는 청년 햄릿과 아리따운 오필리어는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맞춰 둘의 가난한 사랑을 가로 막고 있는 현실을 괴로워한다.

그러다 둘만 남은 상황이 되자 분위기는 돌연 ‘햄릿’이 된다. 원작의 대사를 원용해 가며 자못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 사이에 끼어 드는 것은 그러나 최신 동요다. 분위기는 돌변한다. 자신이 선물한 반지가 짝퉁이라며 뾰루퉁해 있는 오필리어의 완강한 태도를 보고 저 유명한 “To be or not to be”라며 절규하는 햄릿을 감싸는 것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그렇게 ‘햄릿’의 색채가 짙게 흐르던 극은 갑자기 가면 무도회 장면이 등장하면서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바뀐다. 같은 제목의 유명한 영화 주제곡도 때 맞춰 흘러 나온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장면은 배우들의 연습이었음이 밝혀진다.

이 연극은 결국 연극이 이 시대에 대해 던지는 발언이다. 메커니즘이나 가상 현실 같은 것들이 아무리 판 쳐 봤자, 연극이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임을 주장한다. 두 달 동안 라면 먹을 것을 아낀 대가로 반지를 선물한다는 극중 연극 배우의 고백은 우리 연극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들린다. 그러나 예술로서의 연극에 대한 주장은 언어가 아니라 갖가지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통해 표출되는 것이어서 관객들은 무난히 받아들인다.

자칫 젊은 연극인 특유의 재치 혹은 산만함으로 낙착될 수도 있는 이 작품의 발랄함(속물적 취향에 대한 탐닉)은 그러나 그 같은 주제 의식을 놓쳐 버리지 않기에 힘으로 다가온다. ‘춘궁기’‘한여름 밤의 꿈’ 등에서 이미 특유의 걸쭉한 입담을 선보였던 극작가 박수진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평론가 김미도의 평을 빌면 “또래의 젊은 연극인들과 달리 문학성과 연극성을 조화롭게 추구한” 작품이다. 또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승과 저승, 과학적 실재와 비상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점에서 현대 철학적 존재론과도 결부된다.

눈 여겨 볼 대목은 최근 몇 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한 한국 뮤지컬의 성과 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발라드, 메탈, 클래식 등 갖가지 종류의 음악 반주를 배우들은 머리에 부착한 무선 마이크 덕에 또렷한 목소리로 능란히 받아 넘기고 있다.

이 작품은 연극이란 낡아 빠진 예술 형식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본 세상,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재생산해 낸 고전에 관한 연극이다. 연극을 빌어 연극 이야기를 하는 ‘메타 연극’인 셈이다. 5월 29일까지 소극장 아리랑. 02-741-6069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5-05-03 19:50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