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을 휘돌아 농익은 봄바다로 간다동해안 7번 국도 남쪽 끄트머리 길, 뛰어난 풍광의 산록과 바다 압권
[주말이 즐겁다] 고성 아야진~송지호 드라이브 설악을 휘돌아 농익은 봄바다로 간다 동해안 7번 국도 남쪽 끄트머리 길, 뛰어난 풍광의 산록과 바다 압권
백두대간의 높다란 고개인 미시령을 넘어서면 강원 고성 땅이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울산바위가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설악의 어깨 위에 우뚝 솟아있다. 높새바람을 안고 바다로 내려가는 험한 굽이 길은 울산바위에 눈길을 빼앗겨 늘 조심스럽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 정자의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520년(중종 15)에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662년(현종 3) 재중수할 때 당시 금강산에 머물던 송시열이 이곳에 들러 친필로 ‘청간정(淸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884년 갑신정변 때 불타버린 것을 1930년경에 재건했다. 정자 안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고, 그 옆엔 최규하 대통령의 ‘악해상조고루상(嶽海相調古樓上) 과시관동수일경(果是關東秀逸景)' 이라는 시판이 걸려 있으니 권력자들도 자주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청간정 북쪽 해안에 자리한 아야진(我也津)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다. 방파제 끝에 서있는 새하얀 등대가 예쁘다. 파도 치는 갯바위엔 낚시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요즘엔 이면수어가 많이 올라온다. 이면수어는 새치의 다른 이름으로 큰놈은 이면수어, 작은놈은 가리쟁이라 나눠 부르기도 한다. 이 특이한 이름은 한 어민에게서 유래했단다. 옛날 관북지방 바닷가에 한 어부가 있었는데, 그는 고기잡이를 나가기만 하면 매번 이 고기를 많이 잡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고기의 이름을 몰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임연수가 낚은 물고기’로 부르다가 나중엔 그냥 ‘이면수어’라 했다는 것이다. 아야진을 나와 7번 국도를 따라 6km쯤 북진하면 물 맑은 송지호(松池湖)다. 송지호를 끼고 있는 주변 마을들엔 북방식 전통가옥인 양통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죽왕면 삼포리의 어명기 가옥, 인정리의 이덕균 가옥, 오봉리의 함정규 가옥 등이 모두 송지호 반경 2km 안에 들어있다. 대표적인 삼포리 순포마을의 어명기 가옥으로 들어서는 솔밭길은 20~30m쯤으로 비록 거리는 짧아도 정감이 넘친다. 꾀꼬리 지저귀고 송화 가루 날리는 솔밭 사잇길로 들어서면 영동 북부지방의 부유층 가옥이 나타난다. 낡은 화장실과 방앗간을 최근 보수하는 바람에 ‘급조된’ 냄새가 풍기지만, 디딜방아의 닳아진 흔적에서 250여 년 세월의 더께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집은 역사만큼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1946년 토지개혁 때 북한이 이 집을 몰수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고, 6ㆍ25전쟁 때는 국군 제1군단사령부가 병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어명기 가옥에서 오봉산과 송지호를 에돌아 가면 죽왕면 오봉리의 왕곡(旺谷)마을이 반긴다. 강원 북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통집 2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통 마을답게 입구의 솔밭에서부터 마을의 유래가 느껴진다. 가옥은 대부분 200여 년 전인 19세기 전후 건립된 것이다. 송지호로 흘러드는 실개천을 끼고 양쪽으로 자리잡은 집들은 거의 남향이다. 담장도 높지 않고 마을길과 연결되는 앞뜰이 개방적이어서 시원스럽다. 오봉리는 오음산을 주산으로 하여 두백산 공모산 순방산 제공산 호근산 등 5개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마을은 병화불입지(兵火不入地)로서, 다섯 봉우리와 송지호에 의해 외부와 차단돼 6ㆍ25전쟁 등의 재난 속에서도 전통 가옥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이나 모두 굴뚝에 항아리를 얹은 게 특이하다. 굴뚝은 대부분 사랑방 측면 벽 가까이 붙어 있는데, 전체적으론 1.2~1.5m 쯤의 높이로 밑이 넓고 위가 약간 좁은 원통형이다. 작은 자연석이나 기와를 흙과 같이 섞어 차곡차곡 쌓아 매우 정감 있다. 그리고 굴뚝 맨 위엔 커다란 항아리를 얹어놓아 보기에도 제법 좋다. 또 특이하게도 마을에 우물이 없는데, 이는 마을 모양이 배의 형국이어서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다.
입력시간 : 2005-05-03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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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