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을 연 들꽃화원 "선녀들의 놀이터이던가"각종 희귀야생화의 천국, 원시의자연이 숨쉬는 오지
[주말이 즐겁다] 곰배령 트레킹 비밀의 문을 연 들꽃화원 "선녀들의 놀이터이던가" 각종 희귀야생화의 천국, 원시의자연이 숨쉬는 오지
강원 인제의 점봉산(1,424m) 일대는 국내에서 생태계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의 하나다. 울창한 숲에는 희귀한 각종 야생화가 많이 자생한다. 특히 점봉산 남쪽의 곰배령은 들꽃 트레킹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마지막 고갯마루 부근이 조금 가파르지만 흙 길이라 위험하지는 않아 초등학생 낀 가족도 무난하게 즐길 수 있다.
온갖 들꽃이 만발한 곰배령 숲엔 북한의 국화인 함박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계곡 옆은 감자난초, 나리난초, 천남성의 차지다. 얼마쯤 오르면 짙은 숲 그늘에 양치식물인 관중(貫衆)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관중이 가득한 숲은 마치 중생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어 자줏빛 붓꽃, 보랏빛 매발톱꽃이 번갈아 나타나는 숲을 걷다 보면 갑자기 나무 그늘이 사라지고 하늘이 열린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들꽃 세상, 바로 곰배령 정상이다. 봄날의 으뜸 주인이었던 얼레지는 이미 시들었다. 지금은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건너가는 계절에 피어나는 들꽃들의 천국이다. 샛노란 꽃을 앙증맞게 피운 미나리아재비가 가득하고, 그 사이 연분홍빛 쥐오줌풀이 산들바람에 하늘거린다. 멀리 뒤쪽으로는 최음제로 이름 높은 털개회나무(정향나무)가 자줏빛 꽃을 피우고 있다. 토종이름이 ‘수수꽃다리’인 이 꽃은 세계적으로는 ‘미스킴 라일락’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광복 직후 북한산에서 이 꽃을 발견한 미국의 화훼업자들이 씨앗을 받아가서 관상용 정원수로 개발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발에 밟힐까 봐 조심조심 걸으며 들꽃 하나 하나와 모두 눈을 맞추다 보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살아있다는 행복감이 가슴 속 가득하다. 바람 부는 이 들꽃화원에 그대로 누우면 세상 모든 근심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다.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고요히 흐른다.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다. 곰배령을 포함한 점봉산 일대는 ‘식물자원의 보고’다. 가끔 철없는 탐승객이 나물을 뜯고 꽃을 꺾는 경우가 있으나 곰배령은 나물 채취가 원천적으로 금지된 보호구역이다. 1982년 설악산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에 포함될 당시 함께 지정되었고, 산림청에서는 진동리와 곰배령 인근의 숲을 천연림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점봉산에 자생하는 식물은 850~950여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식물 종수의 20%에 이른다. 이중 희귀ㆍ보호식물은 모데미풀, 한계령풀, 노랑무늬붓꽃, 금강초롱, 칼잎용담, 홀아비바람꽃 등 50여 종이 넘는다. 점봉산이 이런 자연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토양이 건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난 300~400년 동안 산불이나 수해 같은 큰 위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의 시각이다. 해발 1,164m의 곰배령 고갯마루를 무대로 펼쳐지는 들꽃의 향연은 5월부터 8월 말까지 이어진다. 9월 중순에 들어서면 곰배령 초원은 벌써 늦가을처럼 황량하게 변한다. 물론 연보랏빛 쑥부쟁이와 주홍빛 동자꽃, 자줏빛 용담 등이 피어나지만, 아무래도 곰배령 들꽃 트레킹은 5월 중순부터 8월까지의 4개월간이 적합하다.
귀둔 주민들이 양양 갈 때 넘던 고개 이 곰배령은 동쪽의 진동리 설피밭 주민들과 서쪽의 귀둔마을 주민들이 내왕하던 길목이요, 심마니와 약초꾼들이 이용하던 고갯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마니의 모둠터가 고갯길 곳곳에 남아 있었다. 또 귀둔마을 주민들은 곰배령과 박달령을 넘어 오색으로 넘나들었다. 귀둔의 노인들은 봄철 장 담글 때 필요한 소금을 구하기 위해 노새를 끌거나 통을 얹은 통지게를 지고 양양시장까지 100리 길을 걸어서 다녔던 일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입력시간 : 2005-06-0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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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