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걱대는 대숲 정자에 올라 한국의 선비정신을 만나다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전통정원, 그림같은 원림에 매료

[주말이 즐겁다] 담양 소쇄원
서걱대는 대숲 정자에 올라 한국의 선비정신을 만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전통정원, 그림같은 원림에 매료


죽향(竹鄕)으로 불리는 담양은 대나무 고을이다. 담양을 돌아다녀 보면 대밭을 거느리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인데, 대나무와 함께 담양을 특징짓는 또 하나는 곳곳에 세워져 있는 누정(樓亭)이다. 특히 무등산 동북면에서 발원해 무등산 동쪽을 적시고 흐르는 증암천(甑岩川)은 담양의 누정이 몰려있는 물줄기다. 송강정ㆍ식영정ㆍ환벽당ㆍ소쇄원 같은 누정이나 원림은 호남가단의 구심점으로서 가사문학권을 이루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최근 세계문화유산 등록 신청한 소쇄원
그 중심에는 조선 최고의 민간 원림으로서 얼마 전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한 소쇄원(瀟灑園)이 있다. 이 전통 원림을 경영한 이는 양산보(1503-1557)다. 왕도 개혁 정치가인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스승의 뜻이 실패로 돌아가고 화순 능주에 유배되어 죽게 되자 장례를 치르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7세.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상의 명리(名利)를 좇지 않고 평생 소쇄원만 경영하며 살았다.

이 원림에서는 성리학자들의 은둔과 은일 사상이 물씬 풍겨 나온다. 맑은 햇살이 비껴드는 울창한 대숲을 지나면 계곡의 바윗돌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계류가 반긴다. 계류가에 자리잡은 정자 풍경은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다.

명옥헌에 붉은 배롱꽃이 가득 피었다.

소쇄원(瀟灑園)의 소(瀟)는 ‘빗소리 소’나 ‘물 맑고 깊을 소’, 쇄(灑)는 ‘깨끗할 쇄’라는 뜻이다. 이를 풀면 소쇄원은 ‘물 맑고 깊은 깨끗한 원림'이라는 뜻이 된다. 소쇄원의 대표적인 구조물인 제월당(霽月堂)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는 뜻이고, 광풍각(光風閣)은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다’는 뜻이다. 또 오곡문(五曲門)은 조선 선비들의 이상향이자 주자가 학문을 닦았던 중국 무이산 계곡의 무이구곡 중 제5곡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는 스승이었던 조광조 같은 세상의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서린 명칭이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경영한 원림이고, 호남가단을 이룬 시인묵객들이 오가며 수많은 시를 남겼지만, 소쇄원의 진정한 주인은 울창한 대숲과 굽이굽이 돌아가며 떨어지는 와폭과 계류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조건을 지닌 풍광은 한반도에 아주 흔하다. 하지만 거기에 건물을 짓고 담장을 세우고 화단을 꾸미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안목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쇄원을 일컬어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라고 한 전문가들의 찬탄은 적절하다. 거기에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빚어낸 문향(文香)이 원림에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니 이 나라 최고의 민간 원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런 정도라면 소쇄원에 흐르는 정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곳은 한량이 음풍농월을 읊던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양산보가 못다 한 이상 실현을 위해 고뇌하며 이 세상을 경영할 재목을 길러내는 요람이었던 것이다.

욕망을 내려놓는 정자라는 식영정 너머로 호남의 정신을 지켜온 무등산이 솟아 있다.

욕망을 잠시 쉬게 하는 식영정
소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세기 중반에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을 위해 지은 것이? 인근 정자들 가운데 桓좇?제일 좋거니와 무엇보다 요즘처럼 배롱나무에서 붉은 꽃이 필 무렵이면, 식영정 앞으로 펼쳐졌던 옛 자미탄의 여름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늙은 배롱나무에서 번지는 그윽한 꽃향기를 맡다보면 잔잔한 광주호 너머로 무등산(1,187m)이 지척이다. 정자 둘레로 펼쳐진 솔숲도 빼어나니 비록 대밭이 멀다 해도 아쉬울 건 없다. 식영(息影)은 ‘장자(莊子)’ 우화에서 따온 것으로 ‘그림자를 쉬게 한다’나 ‘그림자를 끊는다’는 뜻이다. 그림자는 욕망이다. 결국 식영정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를 잠시 놓아두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신선의 공간인 것이다.

이외에도 소쇄원을 찾아간 담양 나들이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 바로 고서면의 명옥헌(鳴玉軒). 정자 둘레엔 100여년 수령의 배롱나무 수십 그루가 울창한데, 한창 만개할 때는 정자는 안 보이고 오로지 불그레한 꽃잎만 장관을 이룬다. 소쇄원과 더불어 아름다운 민간 원림으로 꼽히는 이곳은 오희도(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아들 오이정(1619-1655)이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지었다.

* 별미 죽순을 뜨거운 물에 익혀내어 껍질을 벗긴 뒤 가늘게 쪼개 찬물에 담가놓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순회’. 부드러운 죽순과 논에서 잡은 우렁이를 넣고 오이와 당근 양파를 숭숭 썬 다음 초고추장으로 맛있게 버무려 내놓는다. 담양 읍내의 민속식당(061-381-2515)의 죽순회가 유명하다.

* 숙식 가사문학관 주변에 민박치는 집이 몇 군데 있고, 소쇄원과 가까운 남면 연천리에 베스트장(061-383-0290)과 민박집이 있다. 대나무골테마공원(061-383-9291)에도 숙박시설과 야영장이 있다.

* 교통 △88올림픽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분기점이 있어 승용차 접근이 수월하다.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나들목→고서분기점→88올림픽고속도로→담양 나들목→29번 국도(광주 방향)→송강정→고서→887번 지방도→증암천→소쇄원. △동서울→담양=하루 2회(10:00(일반), 16:00(우등) 운행, 3시간50분 소요. △광주(동신전문대 앞)→소쇄원=125번, 225번 시내버스 수시 운행. 30분 소요.


민병준 여행작가


입력시간 : 2005-07-06 16:01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