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숲의 서슬에 무더위도 주춤신라말에 최치원이 조성한 인공숲, 선비의 기개 엿보이는 학사루도 볼만
[주말이 즐겁다] 함양 상림 천년 숲의 서슬에 무더위도 주춤 신라말에 최치원이 조성한 인공숲, 선비의 기개 엿보이는 학사루도 볼만
수천 년의 역사를 통 틀어 경남 함양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은 신라 말기의 정치가요 시인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함양 사람들은 1,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고운에 관계된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조성했다는 상림(上林, 천연기념물 제154호) 덕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 주민들은 여느 우거진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뱀 등의 파충류나 개미 같은 곤충들이 이곳 상림에 없는 까닭도 고운의 지극한 효성에서 나왔다고 풀이하고 있다. 어느 날 고운의 홀어머니는 아들이 조림한 숲을 흐뭇한 마음으로 거닐다가 뱀에 놀랐다. 최치원은 이를 듣고 한달음에 상림으로 달려가 “상림에는 뱀이나 개구리 같은 해충은 모두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마라.” 하고 주문을 외었다. 그리고 떠나면서 “상림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고 숲속에 설죽이 침범하면 내가 죽은 줄 알라”고 말했고, 그후 상림에는 뱀과 개미 같은 해충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상림에는 푸른 산죽이 여기저기 자라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뱀은 아직 본 적 없지만 산죽이 자라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고 가끔 개미들도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 최치원은 죽은 것일까. 그러나 아직도 최치원의 공덕을 기억하는 함양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가야산이나 지리산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숲의 원래 이름은 대관림(大館林)이다. 처음 조성할 당시엔 길이가 5km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중간의 일부가 없어져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는데, 하림엔 민가가 하나 둘 들어서며 훼손되었고 결국 지금의 상림만 남게 되었다. 상림의 총 면적은 21ha로 숲의 길이는 1.6km에 달한다. 비교적 보존이 잘된 상림엔 상록수, 활엽수, 낙엽관목 등 모두 100여 종 3000여 그루의 나무들이 둑을 따라 80~200m의 폭으로 조성돼 있다. 숲 속에는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32호), 함화루(유형문화재 제258호) 및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문화재 자료 제75호), 척화비(문화재자료264호) 그리고 사운정, 초선정 등 정자와 만세기념비, 독립투사 들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이렇듯 상림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양의 너른 들판을 지켜냈을 뿐 아니라 함양 사람들의 사계절 휴식처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여느 고을이 가진 국보급 문화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소중한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사화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학사루
성리학자로 사림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함양 군수로 부임하였고, 그 무렵 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 ?-1512)은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와 있었다. 어느 날 유자광이 함양을 들렀는데 남이 장군을 모함해 죽게 만든 유자광을 기피인물로 삼았던 김종직은 공무를 핑계로 피해 있었다. 함양에 도착한 유자광은 상림을 둘러보고 학사루에 올라 시 한 수를 남기고 떠났다. 김종직이 돌아와 학사루에 올라보니 못 보던 시판(詩板)이 걸려있었다. 유자광의 것임을 안 김종직은 크게 노하였다. 그리하여 시판은 불쏘시개가 되었고, 이 일을 전해들은 유자광은 매우 분노했다. 김종직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과 영남 출신의 유림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훈구파와 맞서는 신진 세력을 이루자 유자광은 성종실록 사초에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실은 것을 트집잡았다. 이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데 대한 비유라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김종직은 학사루에서의 일로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입력시간 : 2005-07-2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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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