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음악인생 "스카라 계곡은 가요인의 고향"

반야월 씨, 회고록과 신곡 작사로 노익장 과시
67년 음악인생 "스카라 계곡은 가요인의 고향"

스카라 극장 인근 인현동 골목을 걸으며 '스카라 계곡'을 회상하는 반야월(오른쪽)씨와 쟈니리 씨. 김지곤 기자

가요계 최고령 원로 작사가인 반야월 씨가 8월 1일 90세(만89세) 생일을 맞아 67년 간의 음악인생을 정리하는 92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과 함께 최신작 ‘스카라 계곡’을 발표했다.

서울 종로3가 스카라극장 지역에 대한 옛 가요인들의 향수와 애환을 그린 이 작품은 작곡가 임상찬이 곡을 붙였고 ‘뜨거운 안녕’으로 유명한 60년대 극장쇼의 슈퍼스타 쟈니리가 취입해 프레지던트호텔 출판기념회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신곡 ‘스카라 계곡’이 발표되자 노래 제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스카라’는 스카라 극장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계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개를 까우뚱하는 대중이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신곡을 발표하면서 한국가요작가협회에 의해 노래비 건립이 추진되고 가요인의 오랜 숙원인 ‘가요인의 거리’까지 제정하려는 움직임까지 생기면서 이 노래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가는 양상이다.

인현동 일대는 가요인의 거리
충무로는 명실상부한 영화인의 거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카라 극장 도로 건너편의 인현동 일대가 ‘가요인의 거리’였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요사의 산증인인 반야월 씨는 “전쟁이 끝난 50년대 중반까지도 이 곳엔 계곡이 있어 해마다 장마철이면 남산에서 유입된 물이 범람해 물바다를 이루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마산방송국에 있다가 1955년 서울로 돌아왔을 땐 복개작업이 한창이었는데 그때 내가 ‘스카라 계곡’이라고 부르면서 지금까지 가요인들은 고향같은 의미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스카라 극장은 한국대중가요의 요람같은 곳이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개관된 스카라 극장의 첫 이름은 아카쿠사(若草)극장. 해방이 되면서 수도극장으로 바뀌었다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1953년 미8군 가수시대를 연 최초의 여성보컬그룹 김시스터즈가 정식으로 팀명을 정해 데뷔한 무대도 스카라 극장(당시 수도극장)이었다.

김시스터즈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의 자녀 등으로 구성된 보컬이었다. 당시 극장을 중심으로 도로 건너편엔 신카나리아가 운영했던 모나미다방, 신카나리아다방, 국제다방은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무명가수들의 집합소였다.

60년대 초반 무명시절의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기 위해 레코드회사를 기웃거렸다.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1964년 여름, 만삭의 몸으로 찜통더위를 이겨가며 힘겹게 녹음했던 곡이 대표곡 ‘동백아가씨’였다. 바로 모나미 다방뒤 미도파레코드 건물이었다.

가요인들이 스카라 계곡으로 모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미도파레코드 녹음실을 중심으로 청계천 음반 소도매업자들과 태동기의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비롯 한국작가협회와 공연단체가 가세하면서 음악학원들까지 밀집했었기 때문. 또 이들을 상대로한 숙박, 유흥업소등이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서면서 ‘스카라 계곡’은 원로 가요인에겐 낭만과 애환이 점철된 고향처럼 기억되고 있다.

반야월 씨는 “가난했던 그 시절 대부분의 가요인들은 커피값이 없어 엽차만 시키다가 쫓겨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가로수 그늘 밑에서 일거리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멸치를 안주삼아 막소주를 들이키고, 담배 한 개피라도 있으면 잘라서 나눠 피웠던 인정이 넘쳤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반 씨는 이어 “그때 스카라 계곡 주변의 폭포수다방, 영산다방, 무지개다방, 국제다방은 항상 가요인들로 넘쳐났다. 저녁 때가 되면 인현동 1가 골목의 아리랑집, 두꺼비집, 초막집, 울산집, 향원집, 고령집등 대포집에서 노래와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실제로 전화가 귀했던 그 시절 스카라 계곡 주변의 다방은 가요인들이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캐스팅과 심지어는 즉석 오디션 장소로도 활용된 다용도 공간이었다.

가요인 애환 담긴 가사, 쟈니리가 불러
14년만에 신보 ‘스카라 계곡’을 취입한 쟈니리 씨는 작년에 들국화의 전인권이 불러 유명한 ‘사노라면??오리지널 가수로 밝혀지면서 화제를 뿌렸던 가수. 한동안 운동가요로 불려지던 이 노래는 작자미상 구전가요로만 잘못 전해지다가 1966년 쟈니리의 첫 독집을 통해 길옥윤 씨가 작곡한 금지곡 ‘내일은 해가뜬다’가 오리지널곡임이 밝혀졌었다.

90년대 초반 재즈독집을 발표한 이래 오랜 공백을 딛고 신보를 발표한 그는 “1966년 내 첫 히트곡 ‘뜨거운 안녕’을 녹음했던 곳이 신세기레코드의 장충동 스튜디오였는데 40년만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녹음을 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스카라 계곡은 마이너곡 같이 슬픈 곡은 아니지만 ‘그때 스타들은 어디로 가고 젊은이들만 남았냐’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 녹음을 하면서 가슴이 찡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또한 “60년대 초반 스카라 극장 앞은 음악하는 사람이면 다 모여들었던 곳이다. 배고팠던 시절이라 누가 설렁탕이라도 사준다하면 저녁까지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두 그릇을 먹는 과식을 해 만성 위장병으로 고생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음반제작자인 작곡가 임상찬 씨는 ”내 자신이 쟈니리선배의 팬이다. 그의 호소력짙은 노래를 알기에 가요인의 눈물과 애환이 담긴 반야월 선생의 가사를 가슴을 울리는 짙은 감정으로 노래할 수 있는 가수는 쟈니리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스카라 계곡의 가사가 완성된 것은 5년전인 2000년께. 하지만 임상찬 씨가 가사를 접한 것은 한달 반 전. 그는 “스카라계곡과 더불어 반야월 선생님의 마지막 곡인 ‘목포의 연정’도 작곡을 마쳤다. 의미가 있는 노래인지라 현재 취입을 앞두고 4-5명의 신인가수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귀띔을 해준다.

출판기념회장에서 쟈니리의 ‘스카라계곡’ 노래를 처음 들은 반야월 씨는 “쟈니리는 60년대에 ‘뜨거운 안녕’을 너무 잘 불렀던 가수다. 이번에도 가요인들의 애환을 담은 내 가사를 절절하게 잘 노래했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90의 고령에 접어든 그는 가요계 최연장자이면서도 지금도 손자뻘되는 후배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는 가요계의 맡 형같은 존재. “신경통이 있고 귀가 어두워졌지만 정신은 멀쩡하고 움직일만 하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 또한 “지금은 10대 20대위주의 음악만이 흐른다.

잔잔하게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머리색을 5-6가지로 염색을 하고 죄다 배꼽티를 입고 무용만 하는, 보는 음악시대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또 “노래들이 전부 템포가 빨라 가사를 전혀 전달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예전에는 ‘감격시대’등 슬픈 노래가 참 많았고 가슴으로 전달되는 노래들이라 객석은 냉수를 뿌린 듯 조용했다. 그땐 가수도 울고 객석도 울고 다 울었다. 우리의 전통가요는 그런 노래인데 남은 후배들이 잘 계승해주었으면 한다”며 따뜻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숱한 가요계의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던 가요인들 마음의 고향이자 요람이었던 스카라 계곡. 주변 지역 대부분이 현대식으로 개발 되어 옛 모습이 상당부분 사라졌지만 스카라극장뿐 만 아니라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당시의 모습이 상당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도 확인되었다.

반야월 선생은 “스카라극장 주변 거리는 가요인들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의 거리라서 ‘가요인의 거리’를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스카라 계곡의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고 1년에 한번이라도 스카라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 눈감기전에는 은퇴는 없고 죽는 순간까지 노래가사를 지어낼 것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어둑해지는 스카라 계곡의 선술집으로 후배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스카라계곡’ 노래비 건립과 ‘가요인의 거리’제정은 현재 서울 중구청과 협의중에 있다.


최규성 차장
사진=김지곤기자


입력시간 : 2005-08-03 16:14


최규성 차장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