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속에 남겨진 AGAIN 1966의 신화를 좇다

[시네마타운] 대니얼 고든 감독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
유년의 기억 속에 남겨진 AGAIN 1966의 신화를 좇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기억할 것이다. 불굴의 집념과 의지로 연장 접전 끝에 2대 1의 역전승을 일궈냈던 감격의 그날, 붉은 물감을 끼얹어 놓은 것 같았던 관중석을 장식한 말이 있었다.

‘AGAIN 1966’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이탈리아를 꺾으며 월드컵 8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팀의 선전을 본받아 이탈리아를 무찌르자는 염원이 담긴 응원 구호였다.

<천리마 축구단>은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역사에 아로새겨진 불멸의 기록을 남긴 북한 ‘천리마 축구단’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미지의 저개발 국가에서 온, 평균 신장 162㎝밖에 되지 않는 단신의 축구 선수들은 엄청난 스피드와 체력, 신체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열의와 집념,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앞세워 영국 축구 팬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북한 축구의 선전은 8강 포르투갈 전에서 먼저 세 골을 넣고도 경험 부족으로 다섯 골을 먹지만 않았다면 4강 진출이라는 천지개벽을 일으킬 수도 있었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들의 마술적 활약에 매혹된 영국 소년이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 <천리마 축구단>을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 대니얼 고든이다. 도깨비 축구팀을 찾아가다 <천리마 축구단>은 서구의 시선으로 북한을 다룬 매우 이례적인 영화다.

영화를 어떻게 찍을 것인가 보다 중요했던 건 ‘코쟁이’라며 서구인들을 경원하는 북한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북한에 들어가는 것부터 당시 선수들을 찾는 것까지 걸림돌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든 감독은 무려 4년 간 수소문과 노력 끝에 북한으로부터 촬영허가를 받아냈다.


2001년 10월 북한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용맹했던 과거의 용사들은 이미 초로의 노인이 돼 있었다. 하지만 경기장에 모인 그들은 가슴에 달린 훈장들이 말해주듯 영광스러운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만은 여전했다.

남한에서 ‘새마을 운동’, 북한에서 ‘천리마 운동’이 맞불을 놓았던 당시 북한 선수들은 “아버지 수령님을 위해 죽기 살기로 훈련하고 뛰었다”고 말한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혹독한 지옥훈련을 받는 모습, 월드컵 경기에서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활약, 영국 미들스브로의 축구 팬들이 인공기를 흔들며 북한 선수들에게 환대를 보내는 기록 필름들은 기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TV 스포츠 프로듀서이자 열렬한 축구광인 고든 감독은 1966년 월드컵에 참가한 북한 선수들의 이름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지만, 북한의 교시가 무엇인지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여 영화는 북한을 깎아 내리지도, 고무 찬양하지도 않는다. <천리마 축구단>은 어떤 정치적 입장도 배제한 축구를 사랑하는 팬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정치적으로 고립된 나라고, 폐쇄적인 국가고, 접근이 불가능한 금지 구역이다. 붉은 깃발과 독재 시스템이 지배하는 전제국가로만 알고 있던 나라에서 온 도깨비 축구단. 느려 터진 세계 축구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준 북한의 벌떼 축구에 대한 호기심이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편견을 버리고 북한 바로 보기 <천리마 축구단>과 함께 개봉하는 <어떤 나라>에서도 고든 감독은 북한에 대한 악의적인 편견을 벗겨낸다. 그는 “그들은

때로는 너무나 순수해 보이고, 또 어떤 때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자처럼 보인다. 정치적인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것을 걷어내면 그들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내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건 이런 점"이라고 말한다. 분단이나 김일성의 독재, 핵 문제, 국제적 고립 등등의 단세포적인 편견은 북한 사회에 대한 일면적 시각임을 영화를 통해 절감할 수 있다.

<천리마 축구단>은 감춰진 사실을 들춰내기 보다 북한이라는 정치적 분쟁 대상국을 보통의 인간이 사는 평범한 사회로 그릴 뿐이다. 고든 감독 역시 북한에 대해 일반적인 서구인들이 갖는 선입견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영화 중간에는 ‘한국에서는 대회가 끝나고 북한 선수들이 탄광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웁뇩온だ?자막이 나온다. 물론 이 말은 영화를 통해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천리마 축구단>은 개인의 기억을 경유해 사회적 의미로까지 주제를 넓혀간다.

남도 북도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객관적일 수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북한을 다루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촬영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북한 당국은 과거의 기록 영화 필름을 마음껏 열람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협조했고, 흩어진 천리마 축구단 멤버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서양에서 온 이 순박한 영화감독의 마음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심으로 1966년 북한 축구단이 보여준 경기를 사랑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북한이 믿었기 때문이다.

천리마 축구단 멤버들은 기억이 소멸되기 전 자신들의 활약상을 필름 위에 남겨 준 푸른 눈의 영국인 감독이 고마웠을 것이다.

1966년 영국인 소년의 유년기를 지배했던 낯선 나라에서 온 축구 선수들은 이제 평범한 보통 노인들이 돼 있다. 유년의 기억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벽안의 영화감독은 행복했던 자신의 기억을 복원해낸 것이다. 더불어 북한 사회에 대한 우리의 속 좁은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한다.


장병원(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8-29 19:26


장병원(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