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들녘 너머 지평선을 보라

[여행] 김제 벽골제
황금빛 들녘 너머 지평선을 보라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이 적시는 전북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고을이다. 펑퍼짐한 들녘은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고 시야를 가릴 만한 높은 산도 없다. 눈을 벨 것만 같은 지평선 위로는 높푸른 하늘만 가득할 뿐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모든 들녘이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계절. 모든 근심 훌훌 털어 버리고 황금빛 지평선이 펼쳐진 김제로 떠나보자.

농경문화의 요람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중앙 관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이 글은 호남의 중요성을 무인답게 간결하게 내린 결론이다.

이 짧은 문장엔 여러 함축적인 뜻이 들어있으나, 호남지방이 군량미의 보급 역할을 하는 조선의 곡창이란 점도 높이 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예부터 소중하게 여겨졌던 호남평야에서도 김제․만경의 들판은 노른자위로 대접을 받았다. 주민들은 이 평야를 ‘징게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부른다. 김제와 만경의 들녘은 이 배미 저 배미 모두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넓다는 얘기다.

전국 최대의 곡창 지대를 이루는 평야의 크기에 비해서 만경․동진강 두 하천은 규모가 작아서 호남 평야의 전 지역에 물을 공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벽골제(碧骨堤)다. 충북 제천의 의림제(義林堤), 경남 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삼한시대의 삼대 수리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큰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조된 최고(最古)의 수리시설이다. 백제 비류왕 때인 330년에 만들어졌으니 거의 1700년 가까이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 때 중수했고 조선 태종 때 대대적인 보수를 했지만, 세종 때 심한 장마로 무너져 제방에 가두었던 물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벽골제의 주요 수원은 원평천과 두월천. 이 두 물줄기가 합류되는 지점을 막아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두어 두는 것이다. 벽골제의 수문은 원래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이렇게 모두 다섯 개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두개로 잘려졌고, 수문도 3개가 사라져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기둥만이 남아있다.

김제의 옛 이름인 마한의 ‘벽비리’와 백제의 ‘벽골’은 모두 ‘벼의 고을’이란 뜻이다. 농경문화의 요람지며 쌀의 본고장답게 김제의 민속과 문화도 벼농사와 관련된 것이 많다. 벽골제 한쪽에 자리한 수리민속유물 전시관은 우리나라 벼농사의 역사와 벽골제에 대해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한편,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이하는 지평선 축제는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나흘간 벽골제 광장 일대에서 열린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오직 한 곳, 김제로 오세요’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 축제는 전통문화, 농촌문화체험, 지평선 쌀 음식 행사 등 8개 분야 75개 분야로 나눠 다채롭게 펼쳐질 예정이다. 올 축제는 농경생활 체험과 전통문화 재현 등 직접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의 장을 꾸민 게 특징.

농촌문화 체험행사에선 허수아비 만들기, 지평선 연날리기, 메뚜기 잡기, 황금들녘 우마차여행,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 지평선 논길 걷기 등이 선보인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에겐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고, 부모에겐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행사다. 무엇보다 김제 황금들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조생종 벼의 본격적인 추수시기 전으로 축제 일자를 맞췄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지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김제·만경 들녘은 민초의 땀과 눈물이 촘촘히 배어 있는 땅이다. 일제는 190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이 평야에서 온갖 착취를 자행했다.

일제 강점기에 폭압에 맞선 인물들이 군산을 비롯해 만주, 블라디보스톡, 동경, 하와이 등지로 옮겨서 40여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바로 김제 너른 들녘이다.

그래서 벽골제 맞은편에 있는 아리랑 문학관을 빼놓으면 김제 지평선의 겉만 훑어본 게 된다. 문학관 1층에 들어서면 <아리랑>의 원고들이 수북하다.

사람 키보다 높다. 제1전시실엔 소설 속 주인공들의 험난한 이주사가 각 부의 줄거리와 함께 시각자료와 영상자료로 전시돼 있다. 혹시 책을 읽지 않았다 해도 대강 이해를 할 수 있게 꾸몄다.

제2전시실엔 작가가 현장 답사를 하며 조사한 기록이 담긴 취재수첩과 작품의 배경을 담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각종 호남 사투리가 빼곡하게 적혀 있거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어놓은 노트들도 눈길을 끈다.

작가 개인의 신변에 초점을 맞춘 제3전시실은 가장으로서의 인간 조정래의 소박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부인과의 기념사진, 아들의 결혼사진, 손수 그린 자화상, 아내에게 선물했던 펜화 등이 전시돼 있다.

여행정보

숙식 벽골제 주변엔 숙식할 곳이 마땅치 않다. 김제 시내에 귀빈장(063-544-2334), 금만장(063-546-6040) 등 모텔급 숙박시설이 있다. 김제시장 입구에 곰돌이네집(063-546-1238) 등 요기할만한 식당이 많다. 만약에 김제 서쪽에 있는 광활면 간척지의 지평선도 구경했다면 심포항 주변의 횟집을 들르는 것도 괜찮다.

교통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접근하면 빠르다.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 나들목→29번 국도→김제시→5km→벽골제. 서김제 나들목에서 20분 소요. △호남고속도로 김제 나들목→714번 지방도→14km→김제시→29번 국도(정읍 방면)→벽골제. 김제 나들목에서 30분 소요.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입력시간 : 2005-10-05 13:16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