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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조하형 作, <키메라의 아침>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서 시작된다



그런 소설들이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 그런 영화들도 있다.

SF작가로 유명한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화 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또 앤드류 니콜의 <가타카>,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위에서 열거한 소설과 영화는 모두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미래가 암울하고 참담하리라는 것이, 인류의 앞날이 결코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이 그러한 디스토피아를 창조해낸 작가들이 전하는 불길한 예언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섬뜩한 악몽의 한 장면이다. 이기적인 욕망과 첨단의 과학기술은 이윤과 효율을 극대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인간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것이며, 그에 따른 혼란과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존재가치를 위협받고 파멸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 이러한 테마는 이제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우리의 작가가 우리의 현실과 모순을 담아 ‘한국식 디스토피아 작품’을 선보인 예는 아직까지 그리 흔치 않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새롭지 않은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바로 거기에 ‘새로운 세상은 미친 세상이다!’라고 외치는 한 편의 ‘새로운 소설’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있다.

무엇보다 예술에 있어, ‘새로움’이란 존재의 이유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움이란 그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 그치고 만다.



단순히 ‘신기한 효과’를 한번 노려보았다거나, ‘이 정도면 참신하지 않아? 나 대단하지?’하는 치기어린 허세나 얕은 교만일 뿐인 ‘실망스러운 새로움’이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매스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대중문화 속에서 우리는 진지한 작가적 성찰이 결여된 ‘얄팍한 새로움’의 치졸한 예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말이 진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그 말은 진정한 새로움을 찾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닌, ‘새로움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하는 새로움만이 바로 ‘신인(新人)’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제3회 ‘문학.판 신인작가 장편소설 공모’의 당선작이기도 한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은 한국문학계의 본격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의 등장을 알린 소설로 평가될 듯 하다.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키메라의 아침>은 틀림없이 ‘새로운 소설’이다. 독자는 바로 그 새로움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조하형이 그리는 미래사회 역시 앞서 나열했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악몽 속의 등장인물들이 ‘레이첼’이란 이름의 사이보그나 초능력을 가진 ‘네오’가 아닌, ‘김철수’, ‘박영구’, ‘이순희’ 등이기에 악몽의 불길함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키메라의 아침>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는 것은 미래의 어느 날, 바로 날개 달린 조인(鳥人) - 즉 돌연변이 신인류가 등장한다는 설정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위협할 정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의 부작용과 욕망을 생산하고 욕망을 소비하는 것에만 매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그늘, 바로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고령화 사회’, ‘유전자 조작’, ‘환경 재앙’ 등의 단어는 주지하다시피 이미 미래의 용어가 아니다. 작가는 각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러한 단어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 참혹하게 구체화될 지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의 주요 배경이 되는 ‘노인촌’은 날개를 갖지 못한(가졌다 해도 날지 못하는 불구의 날개를 가진) 구(舊)인류, 그 중에서도 특히나 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게토’다.

조인이 인류의 주인이 되는 과정 속에서 늙고 병들어 무용한 존재로 밀려난 노인들은 그곳에서 유령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삶을 영위해 간다.

그들의 결핍과 절망은 호흡과도 같이 익숙한 것이며, 그들의 외로움은 겹겹의 올가미처럼 질기고 견고하다. 노인들은 죽음의 주문처럼 ‘나도 날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키메라의 아침>에서의 ‘날개’는 ‘희망의 상징’이나 ‘꿈의 실현’이 아니다. 많은 예술작품들 속에서 ‘하늘을 나는 인간’은 이상적인 모습으로 추앙되어 왔다.

그러나 조하형은 제대로 된 날개가 아닌, 비뚤어진 욕망에 의해 돌연변이의 날개를 함부로 갖게 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를 되묻고 있다.

날개는 인간을 모순의 지옥 속으로 빠뜨렸다. 날개를 갖지 못한 인간도, 날개를 가진 인간도 행복하지 않다.



신인류가 출현했지만, 세상은 ‘미친, 새로운 세상’이 되었을 뿐이다. 작가는 ‘날 수 있기에, 아무도 날지 못한다’고 말한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에서 노인 김철수는 목숨을 걸고 어린 손자를 구한다.

날개를 갖고 있지만 자폐증을 앓고 있는 손자를 살리기 위해 젊은 시절 ‘암벽 등반가’였던 김철수는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른다. ‘인간답게’, 죽을 힘을 다해 기어오른다.

어쩌면 가장 절실하게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이 ‘디스토피아’를 창조하는 것인지 모른다. 미래는 암울하다.

십중팔구 암울해질 수밖에 없는 불길한 징조들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쉽게 유토피아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은 대개 막연한 기대나 몽상에 가까운 희망이다.

미래는 암울하다. 그러나 미래가 암울하다고 말하는 순간, 미래는 암울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디스토피아는 바로 ‘경고’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끔찍하고 어두운 미래를 보여준 작가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미래가 도래하지 않는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창조함으로써 유토피아의 초석을 다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몽이 실현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므로 진정한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


입력시간 : 2005-10-0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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