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비자나무


어떤 나무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하며 수목원길을 거닐었다. 하늘은 청명하기만 한데, 이 계절에 알맞은 나무 찾기가 수월치 않다.

단풍과 열매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한 여름의 왕성하던 활력들은 이미 뚝 떨어져 있으니 말이다. 이럴 때에는 한반도의 그 선명한 계절의 변화에도 변함없이 늘 푸른 나무들이 생각난다.

상록수들은 겨울에 돋보일 때가 많지만 때론 가을 하늘의 푸르름과 초록의 짙푸름이 어울어져 더욱 멋지게 빛나기도 한다.

비자나무도 이런 늘 푸른 나무의 하나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조금은 따뜻한 한반도의 남쪽 땅에 자라니까 중부지방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나무는 아니다. 잘 알려진 주목과 비슷한 모양새로 생각하면 된다.

비자나무는 다 자라면 25m까지 키가 크고, 줄기는 두 아름까지 자라는 큰 키 나무다. 자라면서 정형화한 형태 없이 사방으로 가지가 뻗으며 자란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으로 매끈매끈 하지만,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얇게 세로 줄을 그으며 갈라져 하나씩 떨어진다.

잎은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쯤 되고 뾰족한 잎들이 줄기를 중심으로 깃털 모양 나있다. 본래 나사 모양으로 어긋나 약간 꼬여서 좌우로 달린다.

이 잎은 굳어 만지면 단단한 느낌이고 표면은 짙은 녹색을 띠며, 광택까지 인다. 상록수라 함은 언제나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듯 하지만 각기 남 모르게 잎 갈이를 한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비자나무는 한 잎의 수명이 6년에서 7년이다. 수 많은 잎 들이 약간씩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낡은 잎을 떨구고 새 잎을 달곤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잎에는 늘 푸른 나무로 비추어 진다.

비자나무의 꽃을 본 사람은 더욱 드물 것이다. 비자나무에도 꽃이 핀다. 암꽃 수꽃이 각기 다른 나무를 가지는 암수 딴 그루의 꽃이다.

4월쯤 눈에 두드러지지 않던 꽃들이 개화하고, 바람이 맺어준 인연으로 수꽃과 암꽃이 만나게 되면 그 다음 해 가을에야 열매가 맺는다. 대추처럼 생긴 열매는 가을이 깊어 가면서 붉은 자주색으로 익는다.

비자나무는 쓰임새가 많지만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그 약효 때문이다. 오랜 옛날부터 비자나무의 열매는 구충제로 쓰여 왔다.

하루에 7알 씩 7일간 복용하라는 처방도 있고, 한 번에 7~10알씩 하루에 3번, 식전에 생으로 계속 복용하면 기생충이 물로 되어 버린다는 기록도 있다.

비자나무 열매의 맛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한 알로 구충 박멸'이라는 선전문구를 내건 오늘날의 구충제와 비교하면 조금은 지루한 느낌이 든다. 그 이외에도 비자나무를 몇 가지 약용으로 이용한 기록들이 있다.

비자나무의 종자엔 기름이 많아(50% 가량 지방유를 함유한다) 예전엔 식용유로도 쓰고, 등불 기름이나 머리 기름으로도 쓰였다.

비자나무는 독특한 향이 있어, 가지나 생잎을 태워 연기를 만들어 모기의 접근을 막기도 했으니 우리들의 선조들과 가까운 나무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비자나무의 또 하나의 큰 쓰임새는 목재이다. 나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심재는 갈색이고, 그를 둘러싼 변재는 황색으로 그 결이 무척 아름답고 가공이 쉬워 매우 귀한 목재로 이용되어 왔다.

정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에도 나와 있듯이, 예전엔 비자나무에 대한 무리한 공물로 비자나무림이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비자나무의 거목을 통으로 잘라 고가의 바둑판을 만들겠다는 욕심에 도벌을 당하고 있으니, 이래 저래 수려한 목재일수록 오히려 크게 화를 당하고 있는 듯 싶다.

스님들은 기생충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러 비자림을 조성하기도 했고, 더러 천연분포지도 남아 노거수로 혹은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도 여럿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북쪽한계라는 백양사 비자림이다. 이곳이 단풍놀이로 북적이기 전에 고즈넉한 비자나무숲 향기 맡으며 걷고 싶어 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입력시간 : 2005-10-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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