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5) 황인숙 作, <인숙만필>그녀는 예뻤다


어느 일본 작가의 산문을 읽다가 ‘소확행’이란 단어를 알게 됐다. 소확행(小確幸), 말 그대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을 가진 조어(造語)다.

그 작가는 자신이 일상 속에서 누리는 소확행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대게 다음과 같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신선한 날두부에 차가운 맥주를 곁들여 먹는 일, 서랍 속에 하얗고 깨끗한 속옷을 차곡차곡 개켜 두었다가 하나씩 꺼내 입는 일, 고즈넉한 오후에 조용한 레스토랑 창가에서 안톤 체홉을 읽는 일, 겨우내 낡고 푸근한 더플코트를 입고 다니는 일 등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만의 소확행은 뭘까’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글이었다. 그런 자극을 받은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던지, 블로그와 미니홈피 검색창에 ‘소확행’이란 단어를 치자 줄줄이 ‘소확행 리스트’들이 떴다.

‘한밤 중 부엌 바닥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일’에서부터, ‘지우개가 달린 연필 다섯 자루를 차례차례 뾰족하게 깎는 일’‘옥상 위에 이어폰을 끼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스매싱 펌킨스를 듣는 일’‘갓 구워낸 스콘에 딸기잼을 듬뿍 발라 먹는 일’까지, 모두 누군가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그저 하찮은 것일까. 사소하고 시시하고 지극히 개인적일 뿐, 특별한 의미를 갖기는 어려운 것일까. 아니, 결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의 삶은 많은 경우 작은 즐거움과 작은 괴로움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녕 그렇다.

하여 무엇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주는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은 뜻밖에도 ‘자아(自我)’라는 거창한 개념과 맞닿게 된다.

‘근대’는 곧 ‘개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거의 우리는 근대를 ‘빽빽한 빌딩숲’이나 ‘분주한 컨베이어벨트’, ‘일사불란한 매스게임’ 혹은 ‘상급학교 진학’이나 ‘땅값 상승’, ‘유행 따라잡기’ 등으로 오해해 숱한 갈등과 모순과 부작용을 양산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근대에 대한 오해는 계속되고 있다) 사소한 즐거움과 사소한 괴로움에서 시작되는 자아라는 개념에 좀 더 깊고 진지한 성찰이 있었더라면, 우리 근대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질(質)이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성’이다. 개성이란 근대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미덕이자 최상의 품위다. 그러나 개성 역시 근대와 마찬가지로 숱한 오해에 시달리는 단어다. 개성은 곧잘 방종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로 전락한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까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개성을 갖춘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전부를 걸고 평생에 걸쳐 이룩해야 하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 황인숙의 산문집 <인숙만필>은 한 온전한 개성의 ‘모범 사례’다. 이 책은 개성이라는 것이 ‘튀는’‘유별난’‘압도적인’등의 수식어 없이도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인숙은 전업 문인이자, 독신 여성이자, 독서광이자, 한자맹이자, 자가용과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자기 자신을 글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녀는 한밤중에 방안에 들끓는 개미떼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동네 아가씨가 운영하는 ‘다비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기도 하고, 늦은 가을 아그네스 발차의 음악을 듣고, 포도주를 사들고 친구들과 함께 남산야외식물원으로 피크닉을 간다.

21세기의 서울에서 황인숙은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며, 삶의 순간순간을 깊이 음미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시가 되지 않은 일상의 소소한 단편들을 자신의 개성과 무리 없이 조화시켜 산문을 쓰고, 그녀의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 다감한 존재들의 생생한 질감을 느끼게 한다.

<인숙만필>의 문체는 단순하고 경쾌하며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다. 꾸밈 없이 정갈하고 담백한 맛을 내는 한 그릇 국수 같다.

얼핏 누구나 쓸 수 있을 것처럼 쉽게 읽히지만, 실제로는 가장 고난이도의 필력과 내공을 요구하는 문장들이다. 황인숙의 짧은 산문들은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으며, 아무 것도 구속하려 들지 않는다.

웰옥羚?뭔가 거창한 관점을 피력하려든다 든지, 애써 교훈을 주려 한다든지, 강박처럼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든지 하는 인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은 공허하지 않다. 심심하지 않다. 여유롭고 사랑스럽다. 바로 황인숙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인숙만필>에는 황인숙의 ‘소확행’이 가득하다. 사소한 즐거움과 사소한 괴로움이 가득하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트럼프 놀이의 종류를 쭉 늘어놓은 다음 괄호 안에 ‘이 종목들을 읊노라니 가슴이 뛴다’라고 쓴다.

또 새벽 2시에 ‘킴스클럽’에서 사 온 ‘옛날식 아이스케키, 블루베리 요플레, 김치 5kg, 바나나 한 송이, 티백보리차 한 곽, 탈지분유 한 봉지’를 흐뭇하게 음미한다.

다이어트를 위해 등록한 헬스클럽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기구는 거꾸로 매달려 물구나무를 할 수 있는 기구이고,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양말이라면 질색인 그녀는 거의 언제나 맨발을 고수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또 자연스럽게 감추는 일이란 사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글을 통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인숙만필>의 72쪽에는 ‘나는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러나 <인숙만필>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녀는 예쁘다. 평온한 얼굴에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보기와는 달리 악전고투와도 같은 성찰의 시간을 통해 빛나는 개성을 얻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설가


입력시간 : 2005-10-11 18:46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