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음색 여전한 영원한 현역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테너 엄정행 경희대 음대 교수
청아한 음색 여전한 영원한 현역

‘가곡 대중화의 선구자’ 테너 엄정행(62ㆍ 경희대 음대 교수).

그는 요즘 음악계에 보기 드문 ‘토종’이다. 소위 ‘외국물’을 먹지 않은 순수 국내파 테너다. 그는 또한 운동선수 출신 성악가다.

1961년 음악대학 입학 때까지 그 흔한 개인 레슨 한번 못 받은 것은 물론이고 ‘콩나물 대가리’조차 읽을 줄 몰랐다.

그런 그가 1965년 신문사의 신인음악회로 데뷔 해 지금껏 185회의 독창회, 1,000회가 넘는 음악회를 기록하며 국내 성악계의 큰 나무가 됐다. 유별난 이력은 그의 음악인생 40년이 얼마나 파란만장 한 것이었는지 짐작 가게 한다.

엄 교수는 지난달 데뷔 40년을 기념하는 음반을 직접 제작했다. 그는 앨범의 소개 말에서 ‘노래에도 인생이 그러하듯 어울림과 부대낌이 있다’고 적고 있다.

결코 녹녹치 않았던 40년 간의 어울림과 부대낌이 만들어 낸 수많은 무늬들이 노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5일 왕관 모양 캠퍼스 건물로 유명한 경희대 음악대학의 연구실을 찾아 그를 만나 봤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는 청년 같다. 나이 먹는 것마저 여전히 청아한 음색을 닮은 듯 하다. 데뷔 40년 기념음반을 시판용이 아닌 선물용으로 제작한 것에 대해 그는 “어느덧 환갑을 넘기고 여전히 노래 부르며 과분한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다”며 “이번 음반은 나를 사랑하고 도와주신 분들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음악 교사였던 아버지를 향한 보은의 열창”이라고 전한다.

엄 교수의 고향은 경상남도 양산이다. 그는 중ㆍ고등학교(양산중ㆍ부산 동래고) 시절 배구 선수였다. 당초 대학에도 배구선수로 경희대 체육학과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 전까지만 해도 키 작은 선수도 활약하기 좋았던 9인제 배구 룰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6인제로 바뀌었다.

체육학과에선 173㎝의 단신이었던 그에게 배구선수로는 자격미달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해 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체육과 지원했던 배구선수 출신

중ㆍ고 시절 목소리 좋고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악보도 볼 줄 모르는 그였다. 더욱이 운동선수로 중ㆍ고 시절을 보낸 탓에 성악에 필수적인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는 물론 영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로서는 음대 생활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1학년 내내 ‘그만두고 고향에서 농사나 지을까’ 하며 고민하길 여러 차례. 그러던 중 2학년 때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스승을 만났다. 바로 이탈리아 연수를 마치고 막 귀국한 음악과 홍진표 교수(1979년 작고)였다.

홍 교수는 엄정행을 불러 노래 한 번 시켜보고서는 단박에 재능을 알아봤다. 엄정행으로선 캄캄한 동굴을 헤매다 출구의 빛을 본 격. 엄 교수는 “그 때부터 나의 진짜 음악인생이 시작됐다”고 회고한다.

성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악기’를 그제야 발견한 셈이다. 닥치는 대로, 무섭게 공부했다.

결국 전국 대학생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고 졸업 땐 경희대 성악과 대표로 신문사 주최 신년음악회에 나갔다.

그렇게 졸업은 했건만 가수의 길은 험했다. 우선 당장 노래가 밥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세계백화점에서 악기점도 하고 신촌에선 커피점도 했다.

1968년 결혼 후엔 서부 이촌동 서민아파트 단지 내에서 양장점도 열었다. 그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단추 구입과 ‘오버록(Overlockㆍ미싱의 방식)’을 위해 동대문 시장을 드나들며 시장 사람들과 부대꼈다. 그는 지금도 사람을 대할 때 멋을 부리지 않는다. 당시 시장 생활의 경험일 터이다.

여하튼 6, 7년 간의 ‘외도’에서 큰 재미는 못 봤지만 성악에 대한 더 큰 열정을 키운 시기였다. 그는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한 부인 이미혜자(62)씨가 자기 공부를 포기하고 그의 뒷바라지에 전념하게 된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고 토로한다.

그런 곡절 끝에 1976년 경희대 음대 교수가 됐다. 이후 그는 1979년부터 10년 동안 MBC 라디오 아침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하며 가곡 알리기에 앞장섰다. ‘목련화’ ‘가고파’ ‘비목’ ‘못잊어’ ‘고향의 노래’ 등 숱한 명곡의 멜로디가 나이 든 세대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것은 그의 공이 크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가곡의 전도사’란 별칭도 이때 얻었다. 낮에 강의하고 밤엔 방송준비와 음악회 리허설로 누구보다 바삐 보낸 10년이었다.

그는 “방송을 하면서 정말 여러모로 공부를 하게 됐다”고 밝힌다. 잘 모르는 곡도 해석해야 하고 진행 대본도 손수 쓰자니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 가곡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것은 당연지사.

가곡 프로그램을 진행할 당시에는 TV도 가곡을 대접했고 누구나 가곡 한 곡조는 흥얼거릴 줄 알던 시절이었다.

‘가곡의 밤’ 같은 공연을 하려 치면 자리 구하기가 요즘 10대들을 위한 공연 같았다고 한다. 최근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도 나오는 등 음악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고 평하면서도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이다. 음악시간은 거의 자는 시간이 되어 버린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 고유의 음색 잃지 말아야"

엄 교수는 요즘 젊은 성악도들이 뚜렷한 목표 없이 앞 다퉈 유학길에 오르는 풍토가 내심 불만이다. 외국의 성악을 배우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자칫 우리의 음색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엔 우리는 한이 서린 민족이고 이탈리아는 자유분방한 민족성을 지녔다. 우리나라의 성악가들이 이탈리아의 음색으로 노래하면 아무래도 잘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훈아, 조용필이 인기 있는 건 가락에도 이유가 있지만 한이 서린 고유의 음색 덕이란 게 엄 교수의 생각이다.

이는 북소리ㆍ징소리에 금방 신명이 나 절로 어깨를 들썩여도 팀파니에 반응하려면 한참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설명이다.

엄 교수는 “내 목소리에는 외국 빛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도 물론 엔리코 카루소, 프랑코 코넬리 등의 판을 듣고 공부했지만 우리의 음색을 간직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남달리 창도 배웠고 한글 발음 연구도 했다. 그는 또한 외국 곡은 악보를 분석해 가며 부르면서 우리 가곡은 들은 풍월로 대충 부르는 성악 풍토가 못마땅하다.

엄 교수는 자신이 한국의 음색에 천착하게 된 일화를 소개했다. 미국 진출을 모색하던 1981년 뉴욕에서 한 오페라 연출자와 우연히 만났다.

서양인인 그는 엄 교수를 보고 대뜸 “당신은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없다”라고 단언하더라는 것이다. 당황스럽고 불쾌하기도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대답인즉 “우선 당신의 얼굴은 서양인과 달리 조명 아래에선 달이 된다”고 지적하며 “가슴도 얇아 시각적으로 카리스마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나이 들어 외국어 발음을 제대로 익히기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성악은 몸이 악기인데 왜 그런 한계를 가지고 굳이 서양인의 무대에 서려고 하느냐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의 음색과 몸으로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솔직하다 못해 충격적인 충고를 들었던 셈이다. 엄 교수는 그 길로 미국의 꿈을 접고 귀국했다. 그리고 우리 음색으로 우리 가곡을 부르고 또 불렀다.

정년을 몇 년 앞둔 엄 교수는 2003년부터 고향 양산에서 열리고 있는 ‘엄정행 전국 성악 콩쿠르’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그는 또한 예술적 궁핍을 느끼는 지역에 ‘예술고등학교’를 운영해 보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 밝힌다. 맑은 목소리와 눈매를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지만 젊은 제자들과 늘 함께 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며 웃는다.

요즘도 그는 매달 수차례 무대에 오른다. 영원한 현역이 그의 진짜 꿈이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10-11 19:20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