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해리, 핑크빛 로맨스에 젖다

올해도 변함없이 ‘해리 포터’의 계절이 돌아왔다. 네 번째 해리 포터 시리즈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이하 <불의 잔>)은 조앤 K. 롤링이 쓴 시리즈 가운데 문학적 완성도 면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기대작이다.

<불의 잔>은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들의 핑크빛 로맨스, 그리고 전작까지 실체가 없었던 볼드모트의 본격적인 부활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다루면서 시리즈 전체의 분수령을 이룬다.

<불의 잔> 이전의 해리와 그 이후의 해리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이전까지 다른 이들의 힘을 빌어야만 하는 그림자로 존재했던 볼드모트가 실체를 지니는 순간, 어른들에 의해 보호 받던 해리 포터도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시리즈가 회를 거듭할수록 해리는 차츰 세상의 어둠과 더욱 직접적으로 대면하면서 성장해왔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시절엔 롤링의 원작이 지닌 세세한 설정이 돋보였다.

1,2편을 연출한 크리스 컬럼버스가 롤링의 원작에 최대한 가까우면서도 미국적인 밝고 아기자기한 설정을 선보였다면, 3편인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이하 <아즈카반의 죄수>)를 연출한 알폰소 쿠아론은 어둡고 사색적인 영국 영화의 기운을 끌어들였다.

해리의 곤경

<불의 잔>을 연출한 마이크 뉴웰은 이 판타지 영화에 냉정한 사실주의를 접목시켜 이러한 어둠을 전체로 확장한다. 이는 어른이 되어가는 주인공들의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과 갈등이 주를 이루는 원작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롤링의 원작 <불의 잔>이 영국에서 어린이들이 읽기에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로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이제 ‘아동용’이라는 꼬리표를 단 달콤한 모험이야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4편에 이르러서는 모든 모험과 사건, 인물간의 갈등과 반목이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묘사되고 있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보여졌던 해리의 사춘기는 <불의 잔>에서 훨씬 심화된다.

해리의 첫사랑이 시작되고 서로를 의심할 줄 모르던 해리와 친구들이 질투와 불신에 휩싸이며 해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해진다.

이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질 해리와 볼드모트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리가 성장해 갈수록 그를 둘러싼 상황은 점점 더 어둡고 잔인해진다.

<불의 잔>은 이러한 해리를 둘러싼 기운의 변화를 공간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공간 묘사야말로 <불의 잔>을 이전과 구분 짓는 결정적 지점이다.

이전에 특별히 중점을 두었던 화려한 마법 세계의 묘사는 <불의 잔>에서 그다지 의미가 없다. 호그와트의 전경은 아기자기한 동화 속의 성이 아니라 어둡고 음습한 중세 성곽에 더욱 가깝다. 시종일관 흐리고 어두운 날씨 또한 사실성을 더한다.

마이크 뉴웰 감독은 마법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최대한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마법 세계의 측면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축구 월드컵을 연상시키는 퀴디치 월드컵, 영국의 수상 제도를 의식한 마법 수상의 정치적 제스처, 영국 전통 학교의 기숙사를 본딴 듯한 호그와트 기숙사의 세밀한 묘사는 마법 세계를 현실 세계에 대한 일종의 얼터너티브한 공간으로 설정한 원작의 의도를 읽어낸 뉴웰의 혜안이다.

<오씨>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도니 브래스코> <모나리자 스마일> 등을 통해 인생의 희비극을 누구보다 선명히 그려냈던 뉴웰의 시선은 또한 소년 소녀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건져낸다.

새로운 시리즈의 묘미

새로운 시리즈가 발표될 때마다 기대를 모으는 것은 전편을 뛰어넘는 새로운 볼거리다. <불의 잔>의 하이라이트는 호그와트의 크리스마스 무도회 장면이다.

무도회장은 가장 10대다운 고민들이 투영된 공간이며, <불의 잔>의 가장 낭만적이고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무도회 마지막을 장식하는 록 콘서트에는 영국 밴드 ‘펄프’의 싱어 자비스 카커와 ‘라디오헤드’의 드러머 필 셀웨이, 기타리스트 쟈니 그린우드 등이 함께 출연해 멋진 무대 공연을 선보인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 매드아이 무디, 해리를 비롯해 호그와트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초챙, 명문 마법학교 출전자들 가운데 불의 잔 선택을 가장 먼저 받은 행운의 주인공인 빅터 크룸, 불의 잔이 선정한 보바통 아카데미의 대표 플뢰르 델라쿠르, 불의 잔이 선정한 호그와트의 대표 선수 캐드릭 디고리 등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의 면모도 흥미롭다.

<불의 잔>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방대한 이야기 구조를 자랑하는 탓에 상대적으로 영화화하기는 가장 어려운 면이 있다. 전작들이 비교적 단선적인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 <불의 잔>에는 퀴디치 월드컵, 트라이위저드 시합, 주인공들의 사랑의 줄다리기, 부활을 위한 볼드모트의 움직임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마이크 뉴웰은 이를 취사선택하는 대신 최대한 압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는 그닥 나쁘지도, 그렇다고 그닥 좋지도 않은 것이 되었다.

확실히 원작의 뛰어난 완성도와 문학적 스케일을 단순히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으로는 영화 자체에 손을 들어주기에 2% 부족하다.

그러나 과감하게 자기 스타일대로 영화를 이끌고 나가기엔 유명 원작 시리즈의 영화화라는 한계가 도사리고 있으며, 마이크 뉴웰은 비교적 현명하게 자신의 인장을 영화 속에 조금씩 심어넣는 것으로 만족한 듯 싶다.

명백히 원작을 읽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영화 <불의 잔>은 머리 속으로만 상상했던 이미지들을 스크린 속에 충실하게 펼쳐내는 것만으로 이미 그 할 일을 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병원(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