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책 밖에서 만나는 작가들

이광수, 김동인, 현진건, 나도향, 최서해, 염상섭, 채만식, 김유정, 이상, 이효석, 김동리, 황순원 - 한때 우리는 이 열두 작가의 이름을 외우고 또 외웠었다.

‘다음 중 작가와 작품이 올바로 짝지어 진 것은?’, ‘김동인의 단편소설 중 액자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은?’, ‘이상이 소속되어 활동했던 문인 단체의 이름은?’, ‘다음 중 김동리의 작품이 아닌 것은?’….

이런 시덥지않은 객관식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국어 교과서를 펼쳐 놓고 그들의 소설 여기저기에 밑줄을 긋고 빼곡히 깨알 같은 글씨를 적어놓곤 했다.

그것이 작가 특유의 개성적 문체이건, 극적 사건을 암시하는 복선이건, 3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의 차이이건, 중요한 건 ‘이건 또 어떻게 시험 문제에 나올까’였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을 알면서도, 그들을 모른다. 지겹도록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은 외웠을지언정,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나 예술가적 매력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좀 더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면 그들의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좀 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또 우리는 그들이 암울했던 시대와 부대끼며 어떤 모습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는지, 그러면서도 이 척박한 땅에 근대문학의 씨를 뿌리기 위해 어떤 노력과 열정을 기울였는지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국어 교과서는 ‘시험’을 위해 존재해왔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문학작품과는 평생 이별을 고한다.

수준 있는 고급 문학 독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은 학교에서 문학을 너무 문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배웠기 때문은 아닐까.

이상진의 <한국근대작가 12인의 초상>은 한국근대문학의 초석을 다진 열두 소설가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물론 연보와 희귀사진, 연구 논문 같은 참고 문헌까지 망라되어 있으며, 각 작가별로 자전적인 글 한 편씩이 첨부되어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 또한 높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 교과서를 통해서만 알고 있던 - 마치 화석이나 박제와도 같은 존재로만 여겨졌던 - 과거의 소설가들을 우리와 같이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일화와 자료들을 통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익숙한 존재들이 실은 얼마나 낯설고 새로운 존재들인가를 깨닫게 된다.

김동인, 김유정, 이상, 채만식, 현진건 (왼쪽부터)









우리 근대문학의 시작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바로 이광수와 김동인이다.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대표적인 친일작가로 알려진 춘원 이광수.

그의 비상한 머리와 천부적인 재능은 역시 소설가보다는 정치가나 교육자에 더 적합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그의 고뇌와 모순과 한계는 곧 일제 강점기 우리의 고뇌와 모순과 한계였다.

이광수의 본격적인 친일 행각에 그의 가까운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동인은 그를 찾아가 은근히 자살을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오만한 탐미주의자’로 불렸던 김동인은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광수와는 달리 평양 제일의 갑부 집안 출신으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도련님이었다고 한다.

그의 문학적 출발은 이광수나 주요한 같은 선배들에 대한 흠모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는 차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소설 세계를 발전시켜나간다.

그러나 김동인은 방탕한 생활과 강직하지 못한 기질로 병마와 가난에 허덕이는 처지가 되어 더없이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당시 우리 민초들의 삶 대부분이 그러하였듯이, 많은 작가들이 지금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특히 <홍염>, <탈출기> 등의 작품을 통해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묘사했던 작가 최서해.

그가 겪은 가난은 자신이 쓴 소설 이상의 것이었다. 최서해는 가난으로 어린 딸을 잃고, 그 어린 딸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색동 담요 한 장 사 줄 수 없었던 무능력한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을 그의 수필 <담요>를 통해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동백꽃>, <봄봄> 등의 작품으로 한국적 해학의 대명사가 된 김유정 역시 가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유와 웃음이 묻어나는 그의 소설 이면에 병마와 빈궁함으로 고통 받는 작가의 서글픈 얼굴이 존재하고 있다.

돈이 없어 필승이라는 친구에게 탐정소설 번역거리를 부탁하는 김유정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웃음이 실은 얼마나 눈물에 기인하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된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100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중략)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면서도 결혼을 앞두고 취직자리를 구하기가 막막했던 이효석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인 은사의 주선으로 총독부 검열계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총독부 검열계란 바로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던 곳으로, 동료들의 비난이 빗발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효석은 길에서 우연히 한 동료 문인을 만났다가 ‘너도 개가 다 되었구나’라는 욕을 얻어먹고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만다. 열흘 뒤 이효석은 총독부 검열계를 그만 두었다.

우리 문학계의 영원한 신화이자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이상이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애인과 함께 만주로 야반도주한 여동생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매상>은 이 책의 백미처럼 느껴진다.

전근대와 근대가 어지럽게 뒤엉킨 식민지의 일그러진 현실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여동생에 대한 걱정과 당부와 격려와 애정이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인간 이상의 고매한 영혼을 엿보게 한다.

이 책에 실린 열두 명의 작가는 영원히 살고 있다. 영원히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다면 그들의 작품을 다시 찾아 읽기 바란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작품이 시험공부를 위해 읽히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