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대결 앞에 놓인 복수와 형제애, 그리고 이념

볼거리 위주의 영화가 있고 드라마 위주, 배우 위주, 감독 위주, 하물며 괴물 위주의 영화(<킹콩>이 그런 영화다)도 있다.

<태풍>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근래에 보기 드문 ‘궁금증 위주의 영화’다.

이 영화를 본 뒤 주변인들과 나눈 대화는 대부분 의문스러운 설정들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의 일부 묘사에 대해서는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오가기도 했다.

<태풍>은 궁금증 유발에 관한 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지만 명쾌하게 그 의문을 풀어주는 친절함을 베풀지 않는다.

드라마가 약하다든가, 캐릭터가 일면적이라든가, 보고 난 뒤 남는 게 없다든가 하는 볼거리 중심의 액션 영화가 갖는 전형적인 단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궁금증은 영화와의 거리감을 만들어내고 캐릭터의 감정과 정서에 젖어들만한 틈을 주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성공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그렇듯, <태풍> 역시 남북관계라는 한반도의 특수 상황을 끌어온다.

일명 ‘꽃제비’라 불리는 탈북자의 현실이 드라마의 모티프가 됐다. 타이완 인근 바닷가에서 핵 위성유도장치 ‘리시버 키트’를 싣고 운항 중이던 선박이 납치당한다.

이를 수사하던 국가정보원은 동남아를 거점으로 삼은 해적들의 우두머리 ‘씬’(장동건)이 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해군 대위 강세종(이정재)을 특파한다.

강세종은 씬이 20년 전 북한을 탈출했다가 남한에서 망명을 거절당한 탈북자 가족의 일원 최명신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의 유일한 가족인 누이 최명주(이미연)를 수소문한다.

최명주를 미끼로 씬을 유인하지만 세종은 국가가 부여한 임무와 씬에 대한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갈등한다.

물경 15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제작비, 10개월 간 138회 촬영, 36만 자에 달하는 필름 소모. 제작 규모를 나타내는 계량적 지표만으로 <태풍>은 극장가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물건으로 지목됐다.

<친구>의 감독, <태극기 휘날리며>의 스태프들과 배우가 의기투합한 이 흥행 폭탄은 오랜 시간 영화에 쏠린 세상의 기대에 값하기 위해 진력했다.

장동건과 이정재, 이미연이라는 최상급 캐스팅과 타이의 크라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부산을 오간 다국적 로케이션, 김블(거대한 세트를 올려 놓고 원격 조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치)이라는 고가의 장비를 공수하면서까지 완성도를 높이려 했던 시도, CG와 특수효과를 동원한 첨단의 스펙터클까지 <태풍>은 한국영화의 기술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담고 있다.

1962년 설립 이래 한번도 영화 촬영을 위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국정원과 청와대에서 촬영 허가를 받았고 이국을 누빈 로케이션의 흔적도 곳곳에 묻어있다.

하지만 영화를 지배하는 이야기 가지들이 너무 많다. 씬이 복수의 화신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누이와의 형제애, 강세종의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그리고 씬과 강세종 사이에 피어나는 기이한 연대감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까닭에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지 확실치 않다.

강세종은 왜 그렇게 맹목적인 애국심을 내세우는지, 씬과 강세종은 어떻게 정신적 교감을 이루는 지, 태풍의 핵에서 격전을 치르고 강세종이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등등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다.

성공 신화 따라잡기

<태풍>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씬과 누이 최명주의 블라디보스톡 상봉이다. 20년이라는 유랑의 세월을 보낸 뒤 재회한 남매의 감격을 표현하는 장동건과 이미연의 연기는 코끝을 찡하게 울린다.

스산한 블라디보스톡의 풍광은 고향을 뿌리 뽑힌 남매의 운명을 적절하게 장면화해 낸다. 문제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이 여기 외에 드물다는 것.

남매의 끈끈한 유대를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씬과 강세종의 대결 구도로 드라마를 전환시키는 통에 혈육지간의 감동에 젖어들 틈이 없다.

많은 이야기를 두 시간 안에 담으려다 보니 드라마 전개는 빠르지만 극적 설정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불친절하거나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눈에 띄는 결점을 상쇄하는 것은 배우들의 호연이다. 야윈 뺨과 실핏줄이 서린 눈망울로 천추의 분노를 담아낸 장동건이나 짧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최명주의 험난한 인생유전을 응축해낸 이미연의 얼굴은 기억할만한 잔영을 남긴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로 이어지는 분단 블록버스터는 거대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그 속에서 희생 또는 잠식당하는 개인의 관계에 주목하며 대중들의 환대를 받았다.

<태풍>은 그들과 같은 길을 가려 한다. 국정원 촬영을 통해 긴박한 첩보전의 비주얼을 담아냈던 <쉬리>의 성과를 이어받으려 하고 국가 권력의 횡포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물을 다룬다는 것, 가족애와 형제애 등 휴머니즘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수중 액션 신이 많았으므로 <유령>과의 비교도 피할 수 없다. 드라이 포 웨트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을 사용했던 <유령>에 비해 <태풍>은 김블을 이용한 특수 수조 세트를 제작해 장면의 사실감을 높였다.

남북한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씬의 가혹한 운명, 조국애와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번민하는 강세종의 모습은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질식해가는 인간애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킨다.

<태풍>이 산만하고 중심 없는 이야기가 된 이유는 이처럼 성공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모범 사례들을 따라잡으려는 철저한 기획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 신화를 쓴 액션 블록버스터의 공식들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이 영화의 야심이란 흥행을 위해 영화의 혼을 넘겨준 허망한 욕망으로 기록될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