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겨울을 윤기있게…상록활엽수

가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겨울 나무들의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에 섬세하고 자유로운 멋이 느껴져 한동안 마음을 잡고 있었는데, 너무 추운 날씨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문득 스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 한쪽 구석에 남쪽 섬이나 바닷가에 가면 만나는 상록수림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그래서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하나보다.

마음 따라 발길을 남쪽으로 돌리면, 소나무나 잣나무와 같은 상록 침엽수 대신 잎은 상록이면서 넓고 훨씬 생기 있게 반질거리는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붉가시나무, 녹나무, 육박나무, 생달나무…. 모두 이름이 조금은 낯설 수도 있는 상록 활엽수들인데, 참식나무도 그 중의 하나다.

참식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큰 키 나무다. 해안 모래밭에서 자란다고 하지만, 내가 만난 참식나무는 바다가 가까운 높지않은 산의 숲 가장자리다.

주로 제주도나 남해안 지역에서 자라며, 울릉도에서도 볼 수 있다. 내륙에서 가장 북쪽에 분포하는 자생지는 영광 불갑사가 있는 산 중턱쯤으로, 그곳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이 숲은 상록 활엽수림은 아니고, 서어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나무들 속에 높이가 6m쯤 되는 참식나무가 동백나무등과 함께 모여 자란다. 참식나무 숲과 관련하여 알려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이 절에 있던 정운이라는 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인도의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왕은 정운스님을 추방하였고, 공주가 이별의 정표로 이 나무의 열매를 따서 주었는데 돌아와 심은 열매에서 자란 나무가 바로 참식나무라는 것이다.

참식나무는 다 자라면 보통은 10m정도가 되고, 정말 잘 자라면 15m에 한아름이 넘는다. 잎은 처음 날 때부터 재미있다.

봄이 되면 본래 달렸던 잎은 초록 모습 그대로 아래로 늘어지고, 그 위로 황갈색 솜털이 가득한 새순들이 비죽비죽 곧추 서서 피었다가 점차 제 자리를 찾아간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두껍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크게 3개의 맥이 발달해 있다. 꽃도 특색 있게 늦가을에 핀다. 아주 작은 연한 노란색의 꽃들이 줄기를 따라 우산살 모양으로 다복하게 핀다.

겨울이 오기 전에 꽃은 이내 지고 구술같이 동그란 열매들이 다시 익어간다. 처음엔 노란색에서 점차 아주 고운 빨간색으로 변한다. 더러 완전히 익어도 열매가 여전히 노란색인 것이 있는데 이를 특별히 노란참식나무라고 한다.

추위에 약하지만 그것이 염려되지 않는 남쪽에선 아주 쓸모가 많은 장래성 있는 나무다. 수형도 좋고, 잎도 언제나 보기 좋다.

봄이면 새로운 분위기의 새순이 나오고, 겨울을 윤택하게 해줄 꽃도 적절하고, 열매도 좋으니 정원수나 공원수로 적합하다.

바닷가에서도 견딜 수 있으니 방풍림 같은 것을 조성하는데도 이용할 수 있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기며 향기가 있어 건축용이나 가구를 만드는데 좋다.

불갑사 참식나무에 깃든 정운스님과 인도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엔 조금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숲속에서 자라 다소 낯선 나무 하나에도 사랑 이야기를 심은 것을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절절한 것은 사랑이라 싶다.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할 수 만 있어도 이 겨울을, 이 한 해를 이렇게 보내고 있는 것이 의미 없지는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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