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내가 당신에게서 본 것

‘여행’이란 말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물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여행이란 기대하게 하고 설레게 하고 꿈을 꾸게 한다. 더없이 매력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강영의의 '여행보다 오래 남는 사진 찍기'

‘아, 여행 가고 싶다’라고 중얼거리는 사람의 목소리나 눈빛은 왠지 평소와는 다르다. 그 나직한 울림과 아득한 시선은 어딘가 꿈의 언저리를 더듬는 듯하다.

‘나, 여행 다녀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의 표정 역시 남다르기 마련이다. 그의 미소는 특별하게 빛난다. 조금은 그을린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마른 것 같기도 한 그의 얼굴은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얼굴이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여행이란 낭만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여행을 가고 싶다’와 ‘여행을 다녀왔다’라는 문장 속에는 여행이라는 구체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대’일 뿐이며, 어디까지나 ‘추억’일 뿐이다. 여행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실제의 여행이란 잃어버린 짐이나 잘못 들어서 헤맨 길, 고단한 다리와 불편한 잠자리 같은 것들의 연속이기 쉽다.

맑게 개어주지 않는 날씨,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린 기차, 바가지를 쓰고 산 물건,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그 모든 낯선 것들이 주는 피로와 긴장….

여행에는 기쁨과 감탄 못지않게 실망과 지루함도 동반된다. 여행의 모든 순간이 낭만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변함없이 우리를 꿈꾸게 한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추억 - 우리가 그토록 여행이란 단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이, 모든 번잡한 일상을 뒤로 한 채 여행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와 추억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여행은 사랑과 닮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보니, 당장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다.)

카메라가 텔레비전만큼이나, 디지털 카메라가 휴대폰만큼이나 흔해진 요즘엔 여행을 하며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는다. 인터넷을 몇 분만 뒤적여도 여행지에서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여겨지지만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보편화된 여행법이다. (제 아무리 마르코 폴로나 콜럼버스라 해도 그 흔한 관광기념 사진 한 장 없는 것이다.)

사진 역시 여행처럼 실체가 모호한 개념이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보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순간적인 이미지다.

사진은 영원한 찰나다. 사진이 유일하게 증명하는 것은 사진 속의 대상이 이제는 부재(不在)한다는 사실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찍힌 시간과 공간과 대상과 빛은 다시는 그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수없이 비슷비슷한 여행 사진 중 똑같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는 것이다. 사진 역시 (어떻게 찍혔을까 하는) 기대와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추억으로 완성된다.

강영의의 <여행보다 오래 남는 사진 찍기>는 ‘여행’과 ‘사진’이라는 매력적인 두 단어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다.

강영의는 철저히 아마추어다운 태도로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정의에 따르면 아마추어란 ‘아무 이해관계 없이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잘 알려진 대로 ‘진정한 프로’는 아름답다. 좀 덜 알려졌지만 ‘진정한 아마추어’도 아름답다.

“영화 <중경삼림>을 보던 어느 날 승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후, 대한항공 승무원이 되어 3년간 비행기를 탔다. 결혼 후 사표를 내고, 남편과 함께 1년가량 지중해 연안과 남미를 돌아다녔다.

사진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여행을 계기로 카메라와 친해지게 되었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언제까지고 즐거울 수 있기를, 하는 것은 작은 소망이다.”

이것이 책에 실린 강영의의 자기소개다. 평범한 젊은 여자가 3년간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1년간 해외여행을 떠난다.

어찌 보면 용감하고 어찌 보면 무모하다.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실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나 유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뚜렷하고 거창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막막하고 두렵지만 또 그만큼 그녀가 자유롭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는 그저 여행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 강영의는 그렇게 직접 부딪히며 사진을 배운다. 실수하며 실망하며 실패하며 배운다. 그리고 차츰 알게 된다.

낯선 이국에서 만난 낯선 타인에게 ‘죄송하지만, 당신 사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을 거는 것보다 ‘나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 한 장 찍고 싶은데, 잠깐만 그대로 있어 주실래요?’라고 말을 거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진을 위해 친해지려 하지 말고 사진을 매개로 친해지자’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된다. 강영의는 짧은 순간 자신이 대상에게서 본 것을 정직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그것으로 여행은 오직 그녀만의 여행이 된다.

이스탄불 뒷골목에서 신나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 정어리를 굽는 매캐한 연기로 뒤덮이는 리스본의 저녁,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를 바라보는 노인의 뒷모습, 끝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게 만든 창턱에 올려진 고요한 두 손, 각각 벽과 자전거에 걸터앉아 다감한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 시에스타를 즐기러 발걸음을 서두르는 스페인의 상인들, 아득히 맑은 아드리아의 바다로 첨벙 뛰어든 남자, 완벽하게 흥겨운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니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플라멩코, 호기심이 호감으로 변해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준 이집트의 가난하고 천진한 꼬마들…….

강영의는 사진을 통해 아름답게 빛나는 여행의 순간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어느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진에 대한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카메라에서 눈을 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진정 질투하게 만든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게 만든다. ‘아, 나도 여행 가고 싶다.’ 탄식처럼 중얼거리게 만든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