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늪서 뒹굴며 마초 전성시대 열다

홍콩 누아르라는 변종 장르가 이 땅을 휩쓸던 시기가 있었다.

성냥개비를 질겅이고 비오듯 쏟아지는 총알 사이를 누비며 바바리 코트 자락을 휘날리던 주윤발,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처연하게 죽음을 맞는 장국영, 웨딩드레스를 입은 연인을 실은 오토바이를 몰고 가며 피를 흘리는 유덕화의 비장한 최후가 젊은이들의 가슴에 알 수 없는 울분을 심어줬던 바로 그 시절.

홍콩 누아르의 절망적 비전은 희망 없는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가 되어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대책 없는 감상주의와 과장된 폭력 묘사는 비현실의 극단을 달렸지만 그 속에는 가없는 허무와 절망의 기운이 얹어져 있었다.

‘야수’는 이 같은 홍콩 누아르의 유산을 이어받은 한국적 누아르 영화다. 범죄와 정치권력의 커넥션,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치졸한 세상의 법칙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를 지키려는 마초 남성들의 유대가 누아르 특유의 음영진 비주얼을 통해 부활한 듯하다.

야수라 불리운 사내들

’야수’에서 파국이 보이는 결말을 향해 나가는 인물들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힘과 폭력의 논리를 너무 잘 아는 조직 두목과 몸뚱이 하나로 그를 쫓는 형사, 그리고 법의 이름으로 또 다른 심판을 내리려는 검사.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 폭력의 삼각구도가 ‘야수’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뼈대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야수가 된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불도저형 열혈 형사 장도영(권상우), 법과 정의를 무기로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는 집념에 불타는 댄디한 검사 오진우(유지태), 그리고 강직한 두 젊은이의 타깃이 된 악행의 근원인 조폭 보스 유강진(손병호)이 그 주인공들.

장도영과 오진우는 유강진에게 법과 정의의 힘을 보여줄 이유가 있다. 도영은 배다른 동생이 유강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진우는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정치인의 하수인인 조폭 노릇을 청산하고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심가 유강진의 뒤를 캐려는 장도영-오진우 콤비와 잔인하고 능글맞게 수사망을 벗어나는 유강진의 대결이 용호상박의 양상을 보이며 전개된다.

’야수’는 세기말의 우울을 절망적 비전으로 형상화한 누아르 장르의 관습을 따라간다.

홍콩 누아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신의와 우정으로 맺어진 콤비, 이들의 결속을 무력하게 만드는 냉혹한 폭력의 구조, 죽음을 앞에 두고도 센티멘털한 감상에 젖는 남성 마초주의가 함께 작동한다.

수십억원을 쏟아 부은 액션 블록버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야수’는 결코 밝은 이야기가 아니다. 행복이나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남자들의 폭력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 까닭이다.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공고한 사회악의 구조적 장력을 보여주기 위해 드라마상의 비약과 억지도 눈에 띈다.

이 같은 허점을 메우는 것은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다. 대역을 마다하고 위험한 장면들을 직접 재연해 보인 권상우의 연기는 나름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죽마고우에게도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유강진 역의 손병호 역시 냉철한 조직 보스의 이미지를 잘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필름 누아르 장르의 전형적 설정과 사회파 드라마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야수’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인다.

액션 누아르라는 '상업적 고려'와 사회를 향한 메시지라는 '작가적 고려'가 충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게임의 법칙에 대한 단순도식

’야수’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박찬욱, 송해성 감독의 연출부 생활을 한 신인이다. 패기만만한 초년병의 데뷔작이지만 <야수>는 어쩔 수 없는 구식 마초 감상주의 영화다.

자신의 욕망과 복수를 위해 서로를 물어 뜯고 할퀴는 진창 속 야수들처럼 그들은 예정된 파멸의 길로 빠져든다.

법과 정의의 힘으로 사회악을 일소하려 했던 쿨한 검사도 동생의 복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열혈형사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무도 믿지 않는 냉정한 조직 보스도 모두 무너진다.

승리자는 없고 모두가 패배하는 이 영화의 주된 관심은 야수의 본능을 폭발할 수 밖에 없도록 이끄는 사회 구조에 대한 시선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를 바꿔 나갈 힘도 희망도 없다는, 다소 비관적인 여운을 남기고 영화는 끝난다.

법과 정의가 무효화된 세계, 폭력의 대물림과 순환을 전경화 하는 ‘야수’는 동일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다져놓은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아 야수들은 끊임없이 출몰하고 결국 세계는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는 것. 그리고 법은 그 속에서 별 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하는 악순환의 연쇄고리는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결국은 파멸로 이끌고 간다는 주제는 숱한 영화에서 반복돼 왔다.

‘게임의 법칙’이나 ‘비트’ ‘친구’ 등 폭력과 범죄의 세계를 다루는 누아르 장르의 익숙한 이야기를 ‘야수’는 재탕한다. 문제는 이 영화가 그 위에 덧붙인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말쑥한 꽃미남 권상우가 검게 그을린 얼굴과 수염, 웃자란 더벅머리로 분장하고 호쾌한 액션을 한다는 것 외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많지 않다.

’야수’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저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고 식구들끼리 모여 고기 구워 먹는 겸손한 행복을 꿈꾸는 소박한 인간을 야수로 만드는 세상에 대한 항변이다.

죄인을 단죄하는 심판자에서 죄인의 신분이 돼 법정에 선 오진우의 최후 진술이 그 결정판이다. 영화의 주제를 요약하는 오진우의 말은 정의와 윤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 빌어먹을 세상을 향해 던지는 반향 없는 외침이다.

그러나 이 외침은 너무 단순하고 도식적이어서 생경한 설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