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깃들다

개인적인 얘기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올해로 소설가가 된지 8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4권의 책을 냈다. 감회가 대단히 남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발을 빼긴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득, 그간 글을 쓰기 위해 얼마만큼의 종이와 잉크를 사용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원고지에 만년필로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씩 글을 쓴 선배 작가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미미한 정도겠지만 그렇다고 형편없이 적은 양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의 종이와 잉크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니 8년이란 시간이 실감이 날 것도 같았다.

처음 습작을 시작했을 무렵인 90년대 초반은 컴퓨터의 사용이 급속도로 보편화되던 시기였다. 다른 방법을 굳이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컴퓨터로 소설을 쓴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원고지를 메우며 글을 쓰는 것과는 달리,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 왠지 쉽게 글을 쓰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작가들에 대해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 사용은 휴대폰의 보급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대세였다. 이제 절대 다수의 작가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다. 청탁을 하는 출판사에서도 원고를 ‘파일’로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날로그적인 글쓰기와 디지털적인 글쓰기를 비교하려한다든지, 굳이 그 우열을 따지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술가의 연장’, 즉 ‘창작자의 도구’에 관해서다.

원고지와 만년필을 사용하든 컴퓨터와 프린터를 사용하든 작가는 그것들 없이는 작가일 수 없다. 음악가에게는 악기가, 화가에게는 붓과 물감과 캔버스가, 사진가에게는 카메라와 필름이 필요하다.

우선 필요하다. 그 최소 조건이 만족되지 못하면 제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해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해낼 수 없다.

비단 예술가만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문 요리사는 자신의 칼을 더없이 신중하고 소중하게 다루며 헤어 디자이너는 자신의 가위를 자신의 재산 1호라고 말한다.

수십 년간 그 일에만 매달려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의 도구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손때가 묻고 닳아서 낡고 허름해졌다 해도 뛰어난 목수나 노련한 대장장이는 쉽게 대패나 망치를 새것으로 바꾸지 않는다.

숙련된 구두수선공의 바늘은 수선공의 손끝에서 그의 또 다른 손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들의 도구는 그들 자신의 분신(分身)인 것이다.

폴 오스터의 <타자기를 치켜세움>의 원래 영문 제목은 ‘나의 타이프라이터 이야기(The story of my typewriter)’이다. 말 그대로 소설가 폴 오스터가 글을 쓸 때 사용하고 있는 도구인 자신의 타자기에 관해 쓴 글이다.

폴 오스터는 30년이 넘도록 오직 그 한 대의 타자기로 글을 써왔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러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그 타자기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3년 반 뒤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74년 7월 어느 날이었는데, 뉴욕에서 보낸 첫날 오후에 나는 가방들을 풀었다가 내 소형 헤르메스 타자기가 망가진 것을 알았다. 덮개가 안쪽으로 움푹 우그러든 바람에 키들이 엉망으로 꼬이고 뒤틀려서 수리를 해볼래야 해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새 타자기를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돈이 충분했던 적도 별로 없었지만 하필 그 무렵에는 거의 완전히 파산 상태였으니까. 이틀 뒤, 대학 시절 친구 하나가 나를 자기 아파트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나는 내 타자기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얘기를 꺼냈고, 그 친구는 자기에게 더 이상 쓸 일이 없어서 벽장에다 처박아 둔 타자기가 한 대 있다고 했다. 1962년에 중학교 졸업 선물로 받았던 것인데 만일 내가 그거라도 사고 싶어 한다면 기꺼이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값을 40달러로 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 타자기는 서독에서 제조된 올림피아 포터블이었다. 그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1974년 그날 이후로 내가 쓴 모든 단어는 그 기계로 타이프 쳐진 것이다.”

폴 오스터의 손끝에서 탁탁탁탁 소리를 내며 수많은 종이에 수많은 글자를 찍어낸 그 타자기는 차츰 생명을 얻어간다.

작가가 창조해낸 수많은 인물들의 진실이, 그 인물들을 둘러싼 희망과 절망의 세계가, 무엇보다 작가의 뜨거운 영혼이 조금씩 그 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첨단의 성능을 자랑하는 컴퓨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지만 폴 오스터는 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타자기의 부품을 구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뒤질 정도가 된다.

화가 샘 매서는 그 타자기가 바로 폴 오스터의 분신임을 알아보고 그것을 화폭에 그렸다. 이 책에는 샘 매서가 그린 폴 오스터의 타자기 그림들이 함께 실려 있다. 그 그림들 속의 타자기는 놀랍도록 폴 오스터의 소설과 닮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4반세기 이상의 시간을 같이 보냈다. 내가 어느 곳에 가건, 그 타자기도 나와 함께 갔었다. 우리는 맨해튼, 뉴욕 주 북부, 그리고 브루클린에서 살았고, 캘리포니아와 메인으로, 미네소타와 매사추세츠로, 그리고 버몬트와 프랑스로 함께 여행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연필과 펜으로 글을 썼고, 몇 대의 자동차들과 몇 대의 냉장고들, 그리고 몇 곳의 아파트와 집들이 나를 거쳐 갔다. 또 나는 수십 켤레의 신발을 닳아 해지게 했고 수십 벌의 스웨터와 재킷들을 입다 버렸고 수많은 손목시계와 자명종과 우산을 잃어버리거나 내버렸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낡아 못쓰게 되어서 결국에는 그 용도를 잃게 되지만 내 타자기는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내가 26년 전에 소유했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물건은 그것 하나뿐이다. 몇 달만 더 지나면 그것은 정확히 나와 반평생을 함께 한 셈이 될 것이다.”

소장 가치가 충분하긴 하지만 이 책을 권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서가 달린다.

폴 오스터의 마니아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그의 소설을 서너 권쯤은 읽은 사람이면 좋겠다. 그를 알고, 그의 소설을 알고, 그의 타자기를 알면, 그의 영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