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무거운 하루키

어느 소설가의 서글픈 결론에 따르면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결국 잘못 안다는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에 대한 이해가 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에 대한 오해 역시 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경험들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있다 해도, 역시 ‘오해’하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오해하게 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하물며 인간은 종종 ‘나도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하고 개탄하기까지 한다.

편견과 선입견 없이, 갈등과 모순 없이, 오해를 넘어 이해에 다다를 수는 없는 걸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늙은 아버지는 깊이 사랑했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아들을 잃고 난 후 다음과 같이 서글프게 읊조린다. - ‘완벽한 이해가 없어도 온전한 사랑은 가능하다.’

이해는 사랑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역시 또 사랑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명실 공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이 팔린 일본 작가다.

1990년대 이래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것은 단순한 유행 이상의 일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무라카미 신드롬’으로까지 불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감수성으로 대변되는 하루키의 소설은 새로운 세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무라카미 하루키만큼이나 선입견과 편견에 겹겹 둘러싸여 있는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하루키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유명세만큼이나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도 무척 유명하다고 하겠다.

하루키가 논해지는 자리에서 나오는 얘기들은 대부분 매우 피상적인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설에 대한 객관적인 감상이나 평가 대신 ‘요즘 애들은 왜들 그렇게 하루키, 하루키 하는 거야?’,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하는 호기심과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소설을 읽기 때문이다.

작품을 작품으로만 대하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작가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를 둘러싼 오해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의 작품은 지나치게 사소설(私小說)적이다, 거의 언제나 멜랑콜리하고 시니컬한 독신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는 깊은 밤 재즈가 흐르는 도시의 고급 바(bar)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선문답 같은 것을 주고받거나, 제 집 소파 위에서 오래된 책이나 영화를 보며 종일 빈둥거리다가 배가 고프면 혼자 스파게티나 샐러드 따위를 만들어 먹는 게 고작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그럴싸하게 세련된 척하는 포즈로 가득하다, 한 마디로 가볍다, 깊이가 없다 등등…….

앞서 언급한 대로 오해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 굳건한 편견과 완고한 선입견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려 드는 것은 많은 경우 무력하고 부질없는 노릇이 되기 일쑤다. 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장편 <태엽 감는 새>(전4권)를 권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 하면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를 떠올리지만,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실의 시대>가 어쩌면 가장 하루키답지 않은 작품이란 의견에 공감할 것이다.

<태엽 감는 새> 역시 ‘오해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주인공 ‘나’의 아내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들은 6년간 함께 살며 특별한 문제나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은 부부였다.

그런 ‘나’는 아내의 부재를 당연히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사랑하는 아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괴감은 ‘나’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아내의 가출을 시작으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낯설고 기묘한 일들이 차례로 일어난다.

‘나’는 목매어 죽은 자들의 사연을 간직한 동네의 폐가(廢家)와 그 폐가 주위를 서성대는 문제아 소녀, 그리고 그 폐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말라버린 우물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신비한 예지 능력을 가진 자매가 등장해 여러 부조리한 상황들을 전개시키고, ‘나’는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는 아내의 오빠와 비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대립하게 된다.

또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만주 대륙에서 비극적인 전쟁 체험을 한 노인들이 ‘나’에게 의미심장한 경험담을 전해주고, ‘나’는 차츰 기묘하고 낯선 사건들의 주체가 되어간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아내의 부재와 관련된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가 되어 ‘나’에게 답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태엽 감는 새>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가벼운 작품이 아니다.

말라버린 우물 안에 갇히는 체험, 의식으로서의 창녀, 살아 있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고문, 만주 동물원에서의 동물과 포로의 학살, 오컬트적인 신비체험을 통한 고통의 치유 등 그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봐야만 하는 에피소드들이 소설적 긴장감을 더하며 연이어 등장한다.

하루키는 거대 담론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떠한 개인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지 않는 한 제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복잡하고 부조리한 현상들에 모든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임을 <태엽 감는 새>는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언제나 ‘신세대’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이름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생이다.

이미 환갑에 가까운 나이다. 그에게 특히 열광적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젊은 독자들에게 사실 그는 아버지뻘인 셈이다. 이 점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 당신은 하루키의 무게와 깊이를 제대로 실감한 적이 있는가?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z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