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③ 明月 황진이

명월(明月) 황진이(黃眞伊)는 개성의 명기였다.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 불렀으며, 용모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황진이는 고루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그것도 천대받던 기생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명사들과 거리낌 없는 교분을 나누며 자유분방하게 살다간 풍류 여걸이었다.

박연폭포, 화담(花譚) 서경덕(徐敬德)과 더불어 ‘송도삼절’로 꼽히던 황진이야말로 명기 중의 명기였고, 한국 여성사와 풍류사를 빛낸 걸출한 여인이었다.

황진이는 조선 성종 때에 개성 병부교 근처에 사는 진현금이란 미천한 신분의 여자가 어떤 바람둥이의 꼬임에 빠져 임신을 해서 태어나게 되었으니, 법적으로 말하자면 사생아였다.

단지 그 사내가 이름은 안 알려주고 성만 황가라고 했기에 아비의 성을 따라 황씨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집 총각이 자신을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어버리자 충격을 받아 기생이 되었다고 했다. 스스로 지은 기명은 명월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명기 황진이의 이름이 널리 퍼지자 사방에서 자칭타칭 풍류호걸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황진이를 꺾어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진이는 웬만한 사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재주와 미모가 빼어난 만큼 호락호락 아무 사내에게나 헤프게 정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양반의 자제들이나, 잘난 척 거드름이나 피우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을 마음껏 농락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을 유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30년 수행의 고승이라는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황진이가 소복을 하고 이 지족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선사에게 말했다.

“소녀는 병부교 부근에 사는 진이라고 하옵니다. 대사님의 우레와 같은 고명을 듣고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나이다. 소녀는 일찍이 지아비를 잃고 청상이 되었는데, 마침 의지하고 살 자식 하나 없기에 궁리를 거듭하다 이 몸을 부처님께 바치고자 결심하고 대사님의 제자가 되고자 찾아왔나이다. 원컨대 소녀의 청을 물리치지 마시고 제자로 거두어주소서!”

지족선사 30년 수행 물거품 만든 섹시미 지족선사가 보기에 깊은 산중 암자에서 불도만 닦고 살았지만 참으로 이런 절색은 본 적이 없는지라 마치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자신의 수행을 시험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니 자칭 청상과부라는 젊은 여인의 소복이 비에 젖어 탐스럽게 굴곡진 싱싱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지족선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것이 필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둔갑한 여우가 틀림없어! 두려운 생각이 든 선사는 열심히 염주를 굴리며 속으로 쉴 새 없이 염불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이게 무슨 일인가. 여자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청상과부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시 황진이의 나이는 30세 전후였을 것이다.

한창 물이 오른 풍만한 나신을 보자 선사는 눈알이 팽팽 돌아 미칠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선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청상과부 아닌 황진이에게 덤벼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족선사의 30년 수행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황진이가 그 다음으로 도전(?)한 상대는 저 유명한 도학자 화담 서경덕이었다. 당시 화담은 개성에서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 오른쪽 화담이라는 연못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황진이가 서화담을 찾아왔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더니 갑자기 “아이구, 배야! 아이구, 나 죽네!”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뒹구는 것이었다. 물론 꾀병이었다.

화담이 한 채밖에 없는 자신의 이부자리를 깔아주고 그 위에 눕혔다. 황진이의 비명은 잦아든 대신 신음으로 바뀌었는데, 그 신음이 마치 사내를 유혹하는 교성처럼 요상했다.

화담은 옆방으로 건너가 밤늦게 책을 읽었다. 황진이가 이 영감이 언제 건너와 덮치려나 하고 쉴 새 없이 교태성 신음을 날려 보냈으나 화담은 밤새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황진이가 또 화담에게 찾아갔는데, 그날은 비 오는 날이었다. 황진이는 먼저 지족선사에게 써먹어 성공한 그 수법을 다시 동원했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비에 흠뻑 젖어 육감적인 곡선이며 터질듯이 팽팽한 속살이 훤히 비쳐 보이는 차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도 화담은 꿈쩍하지 않았다. 황진이가 온갖 절기와 비기를 다 펼쳐 교태를 부려도 빙긋이 웃기만 한 채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천하의 황진이도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와 장장 6년간이나 함께 동거한 억세게 재수 좋은 행운의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선전관을 지낸 이사종이란 사람이었다. 이사종은 당대의 명창이요 풍류객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의 노래에 반하고 다음에는 서로의 인물에 반해 더불어 살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우 기발했다. 그것은 6년간 함께 살되 3년씩 상대방의 집에서 번갈아가며 살기로 하고, 그 동안의 생계 또한 집주인이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황진이와 이사종은 이미 500여 년 전에 이 땅에서 계약동거를 실행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벽계수와의 뜨거운 사랑 황진이가 유명한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읊어 유혹에 성공한 종실 벽계수를 만난 것은 황진이의 명성이 나라 안에 널리 퍼진 다음이었다. 천하제일의 풍류남아를 자처하던 벽계수가 송도로 간다니까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도 마침내 송도 명기 황진이의 치마폭에서 놀아보게 됐네그려!” 그러자 벽계수가 코웃음을 쳤다. “흥, 아무리 황진이라도 내게는 어림도 없지! 만만히 보고 덤비기만 하면 다리야 나 살려라하고 도망치게 만들어버리겠네!”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송도로 내려온 벽계수였다. 벽계수의 왕림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과연 벽계수는 잔치가 끝날 때까지 황진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며칠 뒤 벽계수가 만월대로 달구경을 나갔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는데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이 선녀의 목소리같이 아름다운 그 노래의 주인공은 황진이였다. 황진이가 다가와 벽계수의 말고삐를 잡자 벽계수가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와 황진이의 손을 더듬어 꼭 잡았다. 그렇게 하여 벽계수는 황진이와 한 해 동안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천부적 미모와 재주를 타고났건만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해 명월이라는 기생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던 황진이였다.

남자에 못지않게 빼어난 글재주를 지녔건만 여자로 태어나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고, 신분이 천한 여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혼인으로 평온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모진 숙명이 황진이로 하여금 자존심 강한 당대의 명기로 만들고 숱한 남성편력의 길을 헤매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황진이가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시들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황진이는 우리나라의 빼어난 산수의 경관을 사랑하여 자연을 소재로 구슬같이 아름다운 시도 많이 읊었다.

황진이가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언제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4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5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60이 넘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임진강 너머에 있는 황진이의 묘나 박연폭포는 아직까지 마음대로 가볼 수가 없고, 그녀의 묘가 있는 북한 땅 판문군이 건너다보이는 임진각에 가면 조각공원 안에 황진이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1982년에 세운 시가비가 있다.


황원갑 <소설가 · 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