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비범한 삶 살다간 대표화랑…'청조가' 남긴 풍류남아

김사다함(金斯多含)은 신라 진흥왕 때의 풍월주(風月主)이다. 풍월주란 화랑들의 우두머리요, 화랑은 또한 낭도들의 우두머리로서 인품과 자태가 매우 빼어난 사내 중의 사내였으니 사다함이야말로 당대 서라벌에서 으뜸가는 풍류남아였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앞장서 적진으로 돌격한 용감한 소년 장수였으나, 밖으로는 굳세고 안으로는 어진 마음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으며, 평소에는 낭도를 거느리고 산수 간을 유람하며 학문과 무술을 닦고 향가를 즐겨 부르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멋과 슬기를 갖춘 대표 화랑이었다.

인품·무예 빼어난 사내중의 사내

사다함이 김이사부(金異斯夫)를 따라 가야정벌전에 출전하여 가장 큰 전공을 세우고 제5세 풍월주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울린 것은 16세 때요, 짧지만 비극적 한 삶의 막을 내린 것은 17세 때였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매우 짧았지만,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와 ‘열전’ 두 군데나 지면을 베풀어 그의 비범한 풍도와 아름다운 행적을 역사에 길이 전하고 있다.

또한 사다함과 미실궁주(美室宮主)의 비련, 사다함과 무관랑(武官郞)의 우정은 서라벌을 울린 당시 최대의 연애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풍류사에도 길이 남을 비상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사연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고,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1천30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덕분에 알려졌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23년(562)의 가야정벌전에서 사다함의 전공이 으뜸이어서 왕이 좋은 논밭과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포로는 받아서 풀어주어 양민으로 만들고, 논밭은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송했다고 전한다.

사다함이 태어난 것은 진흥왕 7년(546)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가 가야정벌전에 출전한 진흥왕 23년에 16세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역산한 것이다.

사다함은 내물왕의 7세손으로 급찬 구리지(仇利知)와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의 딸 금진(金珍)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다함과 미실궁주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혼인을 약속하게 된 것은 가야로 출전하기 전이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궁주는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때까지 약 40년간 오로지 비상하게 빼어난 미색 하나로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른 일세의 여걸이었다.

사다함을 만날 당시 미실은 막 황궁에서 쫓겨난 직후였다. 미실은 지소태후와 이사부의 아들인 김세종(金世宗)의 부인이었으나 지소태후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내침을 당했던 것이다.

사다함과 미실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반해혼인을 약속하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다가 사다함이 가야정벌전에 출정하게 되었다.

<화랑세기>는 그때 미실이 이런 향가를 지어 부르며 사다함을 떠나보냈다고 전한다. 이 노래는 서강대학교 정연찬 교수가 해독하고 ‘풍랑가’, 또는 ‘송출정가’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아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

이에 사다함이 온갖 방법(?)으로 약혼녀 미실을 위로하고 전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 서라벌로 개선했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철석같이 믿었던 내 사랑 미실이 그 사이에 전 남편인 김세종의 품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사랑을 빼앗긴 사다함의 가슴은 미어질 듯했다. 신분이 비슷하다면 힘으로 되찾아오기라도 하겠지만 상대는 태자․왕자 다음가는 전군(殿君)이니 이 일을 어찌하랴! 그런 까닭에 사다함이 애통한 심사를 담아 부른 노래가 바로 ‘청조가’였으니, 청조란 곧 날아가 버린 새 미실을 가리킴이었다.

-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되리

전주(殿主)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

그때 사람들이 이 노래를 다투어 서로 암송하고 전하며 따라 불렀다고 하니, 비록 그 사연은 애달프지만‘청조가’는 당대 최고의 인기 유행가였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이 너무나 컸기에 사다함은 만사가 귀찮았다. 거기에 어머니 금진궁주의 색광증이 또다시 도졌는데, 그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둘도 없는 친구 무관랑이었다.

금진궁주의 쉴 새 없는 육탄공세에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된 무관랑이 어느 날 밤 황궁 월성의 담장을 타넘어 도망치다가 구지(해자)에 떨어져 크게 다쳤고, 결국 그 때문에 죽고 말았다.

사랑에 배신당한 데다 친구마저 잃어버린 사다함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심신의 고통이 너무나 심했다. 마침내 그는 병들어 누워 종일 눈물만 흘렸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그렇게 사다함은 병든 지 7일 만에 세상을 떴다. 따라서 그 죽음은 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화랑세기>는 사다함이 죽은 뒤 미실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는 너와 부부되기를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장차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사랑의 배신과 친구의 죽음에 충격

<화랑세기>는 사다함이 미실에게 실연당한 데에 이어 무관랑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었다고 했지만, <삼국사기>는 무관랑의 죽음에 애통해하다가 죽은 것으로 얼버무려 마치 사다함과 무관랑을 동성애자처럼 만들어놓았다.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한 이유는 철저한 사대주의 유학자 김부식의 입장으로서는 신라인들의 자유분방한 연애관과 성생활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부식의 눈에 <화랑세기>는 어디까지나 불온서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인의 성생활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신라인에게는 이른바 ‘신국(神國)의 도(道)’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연애관이 있었으니 어찌 그것을 후대의 유학적 윤리도덕의 잣대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다함의 일생은 이처럼 짧고도 비극적인 막을 내렸지만 그의 한 삶이 이토록 비상했기에 그 이름이 ‘청조가’의 애절한 사연과 더불어 풍류사에 길이 남아 전하게 된 것이다.

그 옛날 사다함과 무관랑을 비롯한 그의 낭도들이 무리지어 무술을 연마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던 경주 남산은 거대한 야외 불교미술관으로 변했고,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비련의 무대였던 대궁․양궁․사량궁 등 신라 황궁이 있던 월성터는 사적 1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제는 빈숲에 바람만 쓸쓸한 폐허가 되어 옛사람들의 자취는 찾을 길 없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