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평양의 대표 휴양 관광지 사이판. 이 지역이 최근 이틀 사이 두 가지 뉴스로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한 가지는 사이판에서 새 음반 발매 기념 쇼케이스를 연 가수 이효리가 섹시춤으로 ‘남국의 밤을 녹였다는’ 호들갑스런 기사와 다른 하나는 사이판의 한국 교민 3명이 금품을 노린 조선족에게 피살되었다는 사건 기사였다.

투명한 바다 속에 펼쳐진 산호초와 열대우림으로 80년대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던 사이판. 섹시가수 이효리와 그녀를 지켜본 대중들에게 낭만과 휴양의 땅이었을 이 곳은 한국 교민과 조선족들에게는 그렇지만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사이판의 역사는 휴양지에서의 추억만큼 달콤하지만은 않다. 사이판은 마젤란에 의해 발견된 후 스페인령, 독일령을 거쳐 1차 대전 후 일본 통치령이 된다.

일본은 1914년부터 30년간 한국인 1만 명을 이곳에 강제 이주시켰다. 세계 2차세계 대전 말기에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사이판을 점령하기 위해 사이판에서 일본과 대격전을 벌인다. 이 때 일본군과 미군을 비롯해 징용된 한국인이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치열했던 격전의 상황이 궁금하다면 여기 친절한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할리우드로 성공적으로 입성한 홍콩감독 오우삼의 영화 ‘윈드토커’다.

‘윈드토커’는 44년 태평양 전쟁 말기에 사이판에서 벌어진 실제 전투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다. 이야기는 사이판 전투에 참가한 미군병사와 암호통신병으로 근무하는 인디안 나바호족이 서로 갈등하면서 신뢰를 키워가는 내용이다.

전쟁터에서 동료병사가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난 앤더슨 중사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이판 전투 출격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암호통신병인 인디안 나바호족을 안전하게 보호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군 측 암호를 보호하는 것.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를 사정거리에 둘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사이판을 점령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를 위해 인디안 나바호족의 언어를 새로운 암호체계로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전투병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앤더슨 중사로서는 무전기나 들고 목숨을 건 전쟁터를 누비는 암호통신병이 달가울 리 없었고 더군다나 낯선 인디안 나바호족을 동료 군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암호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위험한 순간 암호 통신병을 사살해야만 하는 앤더슨은 점점 인디안 통신병들과 우정을 쌓아가게 되고 그럴수록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결국 미군의 승리로 끝나는 태평양 전쟁. 영화에는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전쟁에서 진 일본군은 사이판의 해변가 절벽에서 모두 천황만세를 부르며 자살한다. 일본군은 사이판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져 갔다.

그런데 현재 일본군이 남긴 흔적이 사이판 곳곳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이판에서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일본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인 한국인들은 아무도 제대로 기억해주지 못한다. 지난해 아키히토 일왕은 사이판을 방문해 전몰자를 추모하기까지 했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저지하지 조차 못했다. 사이판 내에 일본인들의 막강한 위치 때문이다.

역사의 질곡이 서려있는 땅 사이판. 이곳에서 한국 교민과 조선족은 분명 꿈과 희망을 품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곳은 역사의 가해자에게 더욱 친절한 땅이다. 부는 일궜지만 타국에서 온전하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한국 교민들과 아직도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조선족의 현실이 이를 말해주는 듯하다.


정선영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