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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기형도 作, '잎 속의 검은 잎'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

이번 글은 아주 사적(私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겐 매년 이맘때면 생각나는 남자가 있다. (아니 사실은 평소에도 꽤 자주 그 남자를 생각한다.) 아무튼 이맘때면 더더욱 그 남자가 생각나는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자인데도 말이다.

이맘때 - 겨울, 하고도 늦은 겨울, 겨울의 끄트머리, 소설(小雪) 지나 대설(大雪), 소한(小寒) 지나 대한(大寒), 입춘(立春), 그리고 봄인가, 아니, 아직은 견뎌야 할 추위가 만만치 않지, 예쁜 이름을 보고 방심했다 맵게 감기를 앓게 하는 꽃샘이라는 추위, 꼬리가 긴 바람이 훑고 가는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 종종 때 아닌 폭설, 입춘 지난지가 언젠데, 하는 입버릇, 덜덜, 떨리는 게 아니라 으슬으슬, 움츠러들게 만드는 시린 공기, 그러나 바야흐로 졸업이나 입학, 이별이 곧 만남, 끝이 곧 시작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데면데면 새 학기, 온기 없는 공공건물의 냉랭한 복도, 해(年)를 넘겨가며 물리도록 걸친 외투, 성급히 꺼내 입었다 낭패를 보기 일쑤인 봄빛 얇은 블라우스와 하늘거리는 스커트 자락들, 맨살에 오소소 돋는 소름, 아직은 분명히 추운, 봄 아닌 봄, 겨울인 봄…….

17년 전 ‘이맘때’, 그 남자는 죽었다. 그의 이름은 기형도(1960-1989). ‘이맘때’ 같은 삶을 살다 ‘이맘때’ 같은 시를 쓰고 간 시인이다.

고백하건대, 일찍이 나는 (그동안 이 서평 연재에서 나는 ‘나’라는 단어를 최대한 아껴왔다.) 일찍 죽은 남자들이 좋았다. 메멘토 모리. 어떤 사연으로든 아름다운 청춘에 져버린 고결한 남자들 말이다. 또 일찍이 남자가 된 소년도 좋았다.

예컨대, 전혀 짓궂지 않은 태도와 말이 없고 수줍은 듯 내성적인 표정, 계단에 앉아 혹은 창가에 기대 책장을 넘기는 옆모습이 결코 인위적인 포즈가 아닌, 진지하고 섬세한 영혼을 가진 소년, 느물거리는 마초와는 가장 거리가 먼, 외유내강(外柔內剛), 우물 속처럼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가진, 알고 보면 꽤나 까다롭기도 한, 마르고 가난한 멜랑콜리 소년. 그 소년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어른이 되어버린 남자가 나는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풍토에서 그런 남자는 물론 흔치 않았고, 현실에서 만나기란 더더욱 어려웠으므로, 나는 자주 절망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그런 남자를 찾아 헤매었던(?) 것은 나 역시 공상에 빠지길 좋아하는 낭만 소녀를 해결하지 못한 채 어른인 여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그 이미지에 상당히 부합하는 기형도라는 남자를 찾아냈을 때, 그가 이미 죽은 남자라는 사실이 내겐 더없이 근사한 조건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할 자격이 거의 없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스무 살 무렵이나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가 아니어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얼마든지 있었고, 내가 아니어도 그의 시와 그의 삶과 죽음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와중에 기형도는 슬프고 고독한 청춘의 신화가 되어갔다.

다시 고백하건대, 이 글은 그와의 개인적인 추억을 더듬는 회고담이 아니며, 그의 시를 논하는 전문적인 비평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러나 내게 이상이나 김수영이나 서정주와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는 한 죽은 시인에게, 영원히 미래완료형의 ‘불가능의 연인’이 되어버린 한 남자에게 연서(戀書)를 쓰고 있는 것이다.

또 어찌어찌하여 그 십년 새 나는 그와 ‘동종업계 종사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그의 문우(文友)들을, 그의 각별한 친구였거나 끈끈한 선후배였던 시인 소설가들을, 영원히 청년으로 정지한 기형도와는 달리, 이제는 모두 중년이 된, 더 이상 젊지 않은 그들은 만나게 되었다.

아주 가끔 나는 그의 얘기를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아주 가끔 그들은 그의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 기형도 시인

최루가스가 공기의 일부임을 의심할 수 없었던 20대를 보낸 그들은 자주 피로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러나 무엇도 결코 ‘함부로’이지 않게 하기 위해 여전히 시를, 소설을 쓰는 그들이었다. 겨울보다 추운 이른 봄날, 도시의 수상한 어둠 속에서 시를 쓰는 소중한 벗을 황망히 잃어버렸던 적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었다.

인사동 카페 ‘평화만들기’(문인들 사이에선 전설적인 이 장소도 최근에 자리를 옮겼다.)에서 결 고운 테너의 목소리로 그가 불렀다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그 옛날 올리비아 핫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의 주제가, 어느 여름 기차 여행길에서 한 여인을 두고 티격태격 친구와 벌였다는 귀여운 말싸움, 죽기 얼마 전 어느 초상집에 찾아가 상주를 위로한답시고 싱긋 웃으며 그가 했다는 짧은 한 마디.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내게 그 얘기를 들려주던 기형도를 사랑했던 사람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 <빈집> 전문)

기형도의 시는 언제나 겨울이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이다. 언제나 겨울이다. 아직도 추운 늦은 겨울이다.

겨울을 위하여 누구나 한 개쯤 갖고 있다는 외투,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書記),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내는 나무들, 밤을 하얗게 새우며 두드린 생철 실로폰, 있는 힘을 다해 취한 사내들, 상장으로 종이배를 접어 띄워버린 개천,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신 어머니,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던 놀라운 공중, 꿈의 뼈인 고드름, 저녁의 정거장에 멎은 검은 구름, 자욱한 안개의 강, 딱딱한 하늘, 오후 4시의 블라인드, 쌓이지 못하고 쓸려 날아가는 진눈깨비…….(이 연서의 수신자에게 이 구절들은 충분히 익숙할 것이므로 인용부호는 생략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구절이 사랑을 잃었지만 그 사랑을 잊지는 못해, 결코 잊을 수는 없어 ‘쓴다’는 것임을, 스물아홉, 나는 그가 죽은 나이를 지나오면서 알게 되었다.

아직 나는 그의 무덤에 다녀오지 못했다. 이맘때는 언제나 너무 춥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신조 coolpond@netian.com


입력시간 : 2006-03-1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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