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위강 감독 '데이지' 전지현 이름값 앞세운 다국적 영화

다국적 합작 혹은 협작 프로젝트는 최근 아시아 영화계의 화두 중 하나다. <데이지>는 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제작 노하우의 시너지를 높이려는 국가 간 공동제작의 최신 버전이다.

<와호장룡> <연인>의 프로듀서인 빌 콩 제작, <무간도> 시리즈의 유위강 감독 연출, 한국 배우인 정우성 전지현 이성재 출연, <매트릭스>시리즈 <스파이더맨 2>의 무술감독 임적안의 무술지도, <화양연화><연인><2046>의 음악감독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음악까지.

<데이지>는 아시아 합작 프로젝트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실험한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한국어, 영어, 중국어, 네덜란드어가 마구 섞이고 <화양연화><2046>의 스태프 등 제작에 참여한 인력의 면면도 다채롭다.

장동건의 스타 파워에 기댄 <무극>에 이어 <데이지>는 아시아 합작 구도에서 배우 공급처로서 한국영화계의 특별한 역할을 보여준다. 정우성 전지현이라는 충무로의 빅 카드가 동원된 이 영화는 아시아에서 한국 배우들의 한류 파워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데이지를 배달하는 킬러 <데이지>의 주인공은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군 중 하나인 킬러다. 킬러 박의(정우성)는 첫 청부살인을 한 이튿날 공원의 초상화 화가 혜영(전지현)을 우연히 만난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진 그녀를 사랑하게 된 박의는 외나무다리를 안전하고 튼튼한 다리로 바꿔놓고 매일 그녀에게 데이지 꽃을 배달한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을 돌봐주는 미스터리한 남자를 혜영 역시 연모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폴 형사 정우(이성재)가 데이지 꽃을 들고 나타나자 혜영은 정우를 그 남자로 믿고 사랑하게 된다.

국제 마약 조직을 쫓고 있던 정우는 혜영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만 정우와 범죄조직 간의 총격전에 휘말린 혜영은 총격을 받고 목소리를 잃는다. 혜영의 딱한 처지를 지켜보던 박의는 킬러의 철칙을 어기고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시아 각국에서 검증된 흥행 코드의 결합으로 <데이지>가 노리는 바는 명확하다. 범아시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영화의 모델을 찾으려는 이 영화의 의도에 비춰봤을 때 킬러와 전형성은 큰 흠이 될 수 없다.

문제는 무엇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냐이다. <데이지>는 이 질문에 대답할 만한 뾰족한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숱하게 보아 온 청춘 누아르의 관습 위에 이 영화가 덧붙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음마저 초월한 킬러의 지순한 사랑이라는 모티프는 <첩혈쌍웅>류의 홍콩 누아르에서, 촬영이나 화면 분위기는 왕가위 풍의 감각적인 화면을, 이국의 풍광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과 음악은 곽재용 표 멜로드라마의 그것을 닮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시나리오는 곽재용 감독이 오래 전 써놓은 시나리오다.

킬러와 화가의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 <풍운> <무간도> 시리즈의 유위강 감독을 만나 멜로와 누아르를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참여하면서 꾸준히 합작의 가능성을 모색해왔던 제작자 빌 콩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데이지>는 합작의 모범사례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정적인 한류 상품의 생산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아시아 여러 국가의 영화인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가 이 정도인가라는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국적 프로젝트의 허와 실 <데이지>가 기획될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스타 감독과 배우의 힘이 컸다.

<엽기적인 그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로 영향력 있는 한류 스타의 자리에 오른 전지현과 할리우드 진출을 앞둔 유위강 감독의 명성에 기댄 이 영화는 모인 사람들의 이름값 말고는 특별한 무기가 없다.

문제는 '다국적 기획'이라는 프로덕션 상의 특별함이 초래할 수 있는 역기능을 상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먼저, 네덜란드로 공간을 이동해 뿌리 없는 인물들의 만남과 이별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촘촘하지 못하다.

국가 간 문화 격차 해소를 위해 보편적이고 익숙한 이야기를 택했지만 찰기 없는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것은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절세의 솜씨를 자랑하는 청부살인자라고 보기에 어색한 박의의 캐릭터, 인터폴이라는 무국적 직업 외에 구체적인 성격화가 미약한 정우, 킬러에게 일을 맡기는 암흑가 보스의 존재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무간도> 시리즈에서 팽팽한 남성 영웅들의 감정 줄다리기를 세심한 연출력으로 형상화했던 유위강 감독의 감각도 완전히 무뎌졌다. 청춘 멜로 영화의 산뜻함과 누아르 장르의 비극성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데이지>는 게으른 기획 상품의 허점을 너무 드러내보이고 만다. 영화 속 인물들의 절절한 감정에 동화하기 힘든 과도한 낭만성과 드라마의 비약, 평이한 연기를 벌충하려 동원된 기교적 스타일도 인상적이지 않다.

기본적인 이해를 돕는 수준을 넘지 못하는 드라마의 빈곤함을 현란하고 감각적인 화면으로 만회해 보려는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또 하나의 한류 실험이라고 본다면 <데이지>는 전략이 없는 안이한 상품이다.

관습화된 코드의 답습을 흥행의 안전핀으로 오해한 이 영화는 아시아 합작이건 할리우드와의 합작이건, 중요한 건 제작의 모델이 아닌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냉정한 관객들이 이 어설픈 실험의 가치를 인정해 줄지는 미지수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