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 감독 '오만과 편견'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단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신예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을, 신성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오만과 편견>은 그 두 번째 영화다.

<슈팅 라이크 베컴>과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운명을 개척하는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으로 등장했던 키이라 나이틀리는 이 영화를 통해 배우 이력의 전환점을 맞은 듯하다.

그녀 외에도 배우 진용의 면모가 화려하다. 주디 덴치, 브랜다 블렌신, 도널드 서덜랜드 등 쟁쟁한 실력파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 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클래식한 문예영화의 정석을 보여주는 깔끔한 작품이다.

로맨틱 남녀의 사랑 줄다리기

결혼이 여성의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절, 영국 시골의 소지주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는 다섯 딸을 안정된 가문에 시집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어머니(브랜다 블렌신)와 달리 사랑만이 결혼의 유일한 조건이라 여긴다.

이웃 대저택에 명망 높은 가문의 청년 빙리와 그의 친구 다아시(매튜 맥파든)가 머물게 되고, 댄스 파티에서 엘리자베스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다아시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주위를 맴돌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엘리자베스의 언니 제인과 빙리의 결혼을 다아시가 반대한 사실을 안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한 편견으로 다아시를 외면하다.

다아시는 결국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게 되지만, 편견으로 눈이 먼 엘리자베스는 이를 냉정하게 물리쳐버린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엘리자베스는 서서히 다아시의 진실된 품성을 깨닫게 된다.

<오만과 편견>이 가진 가치의 절반이 원작자 제인 오스틴의 상큼하고 사려 깊은 내용에 빚지고 있다면, 나머지 반은 단연 영화의 제작사인 워킹타이틀의 힘이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워킹타이틀표’ 영화들의 공통 모티브는 상대방의 본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존심을 세우는 청춘남녀의 대립과 교감이다.

<오만과 편견>은 그 모든 이야기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일례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90년대 BBC 미니시리즈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 역을 맡았던 콜린 퍼스를 ‘다아시’라는 같은 이름으로 등장시켜 노골적으로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임으로 암시한 바 있다.

워킹타이틀표를 신뢰할만한 브랜드로 만든 매력적인 캐릭터 외에도 <오만과 편견>의 장점은 많다. 특히 문학의 언어를 시각적 이미지로 옮겨내는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경탄할 만하다.

조 라이트 감독은 영화의 첫머리에서 책을 읽으며 시골길을 걷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통해 문학과 영화를 자연스럽게 연결짓는다. 소설이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나 당대의 사회분위기를 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반해, 영화는 영국의 시골 풍경과 인물의 내면 풍경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정적이고 세련된 매너를 미덕으로 여기는 당시 여성상과 엘리자베스의 분방한 심성이 충돌하는 장면은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어스름한 새벽녘 집에서 꽤나 떨어진 빙리의 저택을 걸어가는 엘리자베스의 씩씩한 발걸음, 시골 댄스 파티에서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즐기는 이미지만으로도 효과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캐릭터를 설명해낸다.

반면 어디서나 갑자기 등장하고, 때로는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다아시의 모습은 엘리자베스에 비해 소극적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한 그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 시대 군상의 개성 잘 그려내

원작의 내용에 훼손을 가하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이 같은 연출은 널리 알려진 유명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따르는 위험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의 모난 듯 독특한 외모는 그녀를 흔해빠진 로맨틱드라마의 전형으로 후퇴시키지 않는다. 울궈먹을대로 울궈먹은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건, 주인공들의 로맨스뿐 아니라 개성 있는 주변 인물들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자란 외모 때문에 결혼 시장에서 환영 받지 못하지만 가정을 갖기 위해 마음에 없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엘리자베스의 친구 샤를롯, 상류계급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다아시의 친척 레이디 캐서린 등 다양한 캐릭터들의 에피소드는 영화를 흥미롭게 이끌어가는 활력소 역할을 한다.

조 라이트 감독은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장 큰 장점이 주인공의 연애담뿐 아니라 그 시대의 군상들을 그려내는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다양한 캐릭터들의 에피소드가 긴밀하게 엮어지면서 주인공의 로맨스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후광효과를 발하는 셈이다. 이는 문학적인 동시에 한편으로 매우 영화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인습과 감정의 충돌이라는 소재에 있어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은 20세기 영국 소설가 E.M 포스터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만과 편견>은 포스터의 소설을 영국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가 영화로 만든 <전망 좋은 방>과 흡사한 전개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망 좋은 방>보다 날카로운 풍자 정신은 덜하지만, 영국 영화 특유의 꼼꼼함과 달콤하고 낭만적인 로맨스가 곁들여진 아기자기한 상업 영화로 손색이 없다. 위대한 문학의 향기를 부활시키는 ‘영화적 번역’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는 소설의 독자가 보더라도 좋을 영화다. 창조적 변형이나 창작자의 개성이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소설의 장점을 가리지 않는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