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아랫마을 섬진강변의 매화와 산기슭 산수유꽃이 시들어갈 무렵이면 화엄사 계곡엔 바야흐로 봄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붉은 홍매화와 연분홍 올벚꽃이 산사의 봄을 여는 화엄사(華嚴寺)는 지리산에 있는 이름난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장엄하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상, 도선 등 수많은 고승들이 머무르면서 “우주의 모든 사물은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화엄사상 구현을 위해 힘써온 절집으로서 우리나라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꼽혀왔다.

홍매화는 올 봄에도 붉게 피고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를 지나면 대웅전(보물 제299호) 앞마당에 이른다. 역시 보물인 동, 서 오층석탑의 단아한 자태를 살펴본 다음 돌계단을 오르면 우람한 몸집의 각황전(국보 제67호)이 두 눈에 가득 찬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인 각황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크다. 이는 지리산의 굳센 맥을 누그러뜨리려고 세운 것이라 한다.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층으로 터져 있다.

화엄사의 봄을 노래하는 홍매화가 피어있는 각황전 앞뜰의 석등(국보 제12호)은 통일신라 불교 중흥기의 찬란한 조각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체 높이가 무려 6.4m로 역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로서, 각황전의 위용과 잘 어우러지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품이 너르고 장엄한 지리산이기에 이렇게 웅장한 건물과 석등을 나란히 앉힐 수 있었을 것이다.

각황전 왼편의 108계단을 올라가면 반송과 동백숲으로 이루어진 효대(孝臺)라는 언덕이 있다. 거기엔 4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이 서 있다.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석탑을 지탱하고 있고, 돌사자들 한가운데엔 합장을 하고 서있는 스님상이 조각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의 어머니라 하는데, 효심이 깊었던 조사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작품을 세운 것이라 한다. 효대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4사자삼층석탑 바로 앞에서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를 받들어 공양하는 스님상은 연기 조사다.

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로서 불법에 귀의해 우리나라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은 이곳에 올라 4사자삼층석탑과 공양석등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적멸당 앞에는 경색도 빼어나고/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을 생각하니/저문 날 가을바람 효대에 감도네.”

아마도 대각국사는 가을에 화엄사를 찾아왔던가 보다. 단풍으로 물든 가을 화엄사 계곡의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거니와 만약 국사가 동백꽃, 홍매화, 올벚꽃 다투어 피어나는 봄날에 화엄사를 찾았다면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귀중한 군수물자였던 올벚나무

화엄사의 봄은 각황전 홍매화와 지장암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로부터 온다.

화엄사 찻집 옆을 돌아서 냇물을 건너면 지장암이란 작은 암자가 이내 눈에 들어온다. 화엄사엔 관람객이 많아도 350여 년 수령을 자랑하는 올벚나무가 있는 지장암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호젓한 암자 뒤 바위 언덕에 자라는 올벚나무는 조선시대에 화엄사를 중창한 벽암스님이 심은 것이다. 병자호란(1636~1637년)이 끝난 후 조정에선 유사시에 대비하여 민간에 벚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벚나무 껍질은 창이나 칼의 자루 등에 쓰이는 귀중한 군수자원이었기 때문이다. 벚나무 껍질은 특히 습기를 막는 효과가 있어 활의 바깥을 감쌀 땐 반드시 필요했다.

▲ 대각국사 의천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는 '효대 시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승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경험이 있던 벽암대사도 이에 호응하여 화엄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때 심은 나무 중에 3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바로 이 나무다.

지장암 근처엔 8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두 그루가 남아 있었으나 한 그루는 적묵당(寂墨堂)을 수리할 때 베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 나무로 만든 판자 한 조각으로 적묵당 안마루를 깔고도 남을 정도였다니 얼마나 큰 거목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참 아쉬운 일이다.

올벚나무는 봄철 피안행사가 있는 춘분이 지난 뒤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피안앵(彼岸櫻)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 열반세계에 도달하는 나무란 뜻이다. 꽃 피는 시기에 맞춰 잠시나마 사바 세계의 고통을 잊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이 올벚나무는 이상기후로 갑자기 꽃샘추위가 닥치지 않는 한 식목일 무렵인 4월 5일 무렵에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화엄사 종무소(061-782-7600 www.hwaeomsa.org)에 문의하면 만개 시기를 자세히 알 수 있다.

한편, 화엄사에서는 매월 두 차례 정기적으로 산사체험 행사를 연다.

4월엔 8~9일과 15~16일에 일정이 잡혀있다. 특히 첫 번째 행사인 8~9일은 홍매화와 올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와 딱 맞아 떨어진다. 화엄사계곡 입장료는 3,800원이고 주차비는 없다. 자세한 사항은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분소(061-783-9105)에 문의.

숙식
화엄사 입구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어 숙식할 곳이 많다. 산사랑펜션(061-783-6090 www.hubpark.co.kr), 프린스펜션(www.jirisanprince.com), 한화리조트(061-782-2171), 지리산 스위스 관광호텔(061-783-0700)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욕쟁이 할머니’로도 잘 알려진 그옛날산채식당(061-782-4439)에서 산채 정식(1인분 8,000원)을 주문하면 각종 나물 등 반찬 30여 가지가 나온다. 지리산대통밥집(061-783-0997)의 대통밥(1인분 10,000원)도 유명하다.

교통
△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 간 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광주 방면)→남원 나들목→19번 국도→구례→화엄사 입구 삼거리. 좌회전해 5km 올라가면 화엄사가 있다.
△서울→남원=강남터미널에서 매일 20~40분 간격(06:00~19:20)으로 수시 운행. 4시간10분 소요. 일반 12,900원, 우등 19,100원. 남원→화엄사=공용터미널에서 매일 30분 간격(07:00~20:00)으로 20여 회 운행. 1시간 소요. 요금 3,100원.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