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개건 감독 '시리아나' - CIA 중동 전문요원이 쓴 회고록 '악마의 조건' 영화화

1970년대 미국에는 자유와 평등, 인권, 양심 등의 가치가 넘쳤다.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베트남전, 히피즘, 소수자 인권운동 등 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과 반문화의 기운이 싹틀 수 있었던 토대 위에서 타락한 세상에 비판이 가능했고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저항과 도발의 새 물결은 할리우드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관점이 용인되던 이 시기 <대통령의 음모>, <도청> <이지라이더>, <개같은 날의 오후> 등 급진적인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진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는 당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정치적'이다. 9.11 테러로 인한 미국적 가치의 상실, 베트남전에 필적할 만한 이라크전으로 인한 패배주의, 전쟁에 대한 회의, 부시의 중동정책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 등이 영화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9.11 테러 직후 중동과 테러리즘은 할리우드가 몰두하는 가장 민감한 이슈 중 하나가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스티븐 개건 감독의 <시리아나>는 9.11 이후의 미국의 중동정책과 그 영향력에 대한 입체적이고 정확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

석유는 미국의 힘

<시리아나>는 크게 네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에피소드가 섞이는 다중 내러티브 방식을 택한다. 각 단락마다 주인공이 다르지만 그들은 어느 순간 만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중동인들에게 미사일을 밀매할 만큼 베테랑인 CIA요원 밥 반즈(조지 클루니)는 CIA로부터 중동 국가의 왕자 암살을 지시받는다. 현지 정보원의 배신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CIA마저 그를 배신하자 반즈는 조직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회의를 갖고 복수를 계획한다.

제네바에서 근무하는 국제경제분석가 브라이언 우드맨(맷 데이먼)은 반즈가 암살하려고 한 왕자 나시르의 경제 자문 역으로 들어가 저개발 중동 국가의 개혁과 민주화에 기여하려 한다.

흑인 변호사 베넷 할리데이(제프리 라이트)는 거대 석유 기업 코넥스와 킬린 간의 합병 과정을 조사하다 비리 혐의를 발견하고 배경을 추적한다.

코넥스의 현지 노동자로 일하던 파키스탄 청년 와심 칸(와자르 무니즈)은 합병의 여파로 해고당한 뒤 실직자 생활을 하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가 된다.

별개의 궤도를 따라 진행되던 네 인물의 이야기는 '석유'를 둘러싼 물밑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묘하게 교차한다. 그들의 관계는 9.11 테러 이후 세계 정세와 풍경에 대한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CIA요원 반즈가 밀매한 미사일이 제3세계 청년 와심의 자살테러에 이용되는 것이 지금 세계의 풍경이다. 뿐인가. 중동작전 스페셜리스트로 수많은 인사들을 암살한 반즈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나시르 암살 작전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의도하지 않은 비극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세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90년대 미국의 대외 정책에 키워드가 된 석유 확보 정책이 어떻게 음모론 혹은 테러리즘과 연결돼 있는가를 밝혀준다.

<시리아나>의 직접적인 모티프는 9.11테러다. 중동의 석유 황제들과 미국 정, 재계 인사들의 커넥션이 밝혀진 것도, 중동 테러리스트에 필적할 만한 CIA의 암살, 테러 작전이 알려진 것도 9.11 이후 '테러'라는 화두가 제기한 숱한 의문들 때문이었다.

감독의 치밀한 조사와 구성의 힘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뒤에 석유 확보를 위한 암투가 있다'는 대담한 주장이 가능했던 건 '사실'에 근거한 치밀한 준비에 기인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21년간 CIA의 중동 전문 요원으로 활동한 로버트 베어가 쓴 회고록 <악마는 없다>이다.

전직 뉴욕타임즈 기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스티븐 개건 감독은 베어의 회고록에 기초해 조사를 진행했다. 중남미 마약 조직의 커넥션과 그로 인해 타락해가는 미국 사회의 풍경을 관찰한 <트래픽>에 이어 개건은 현대 미국 사회의 심각한 병증 중 하나인 '석유를 향한 광신증'을 추적한다.

<시리아나>에서 묘사되는 미국인들은 '석유 앞에 나약한 족속들'이다. 탐욕에 물든 기업인이건, 술수에 능한 CIA건, 양심적인 법률가건, 그들은 석유가 가져다 주는 막대한 이권 앞에 엎드린다. 석유에 대한 집착은 비리를 낳고, 무고한 아이의 죽음을 낳고, 테러를 낳는다.

스티븐 개건과 원작자 로버트 베어는 석유와 관련된 각종 산업의 작동과 원유 산업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광범위한 조사 작업을 벌였다. 영국,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레바논, 두바이 등을 여행하면서 그들은 석유판매성과 현직 CIA요원, 무기상, 이란의 지원을 받는 중동 테러단체 '헤즈볼라'의 지도자를 만났다.

<시리아나>는 석유 전쟁을 둘러싼 주체들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석유 사업의 이권을 위해 암살과 테러도 불사하는 미국이나 민주화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개혁적 중동 지도자나, 생존과 신념을 위해 폭탄 테러리스트가 되는 청년이나,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일 뿐이다.

정치, 경제, 국제관계에서의 힘의 역학 등 만만찮은 문제들을 2시간의 영화에 녹여낸 솜씨도 탁월하다.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꽉 짜인 플롯과 과감한 생략과 함축을 활용한 스피디한 이야기 전개, 치밀한 취재에 바탕을 둔 신빙성 있는 스토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의 뿌리를 냉철한 시각으로 다룬다.

무엇보다 <시리아나>를 보고 난 후의 놀라움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베일에 가려진 세계의 진경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다. 미국의 안하무인격 패권주의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 뼈저린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에 주목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