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⑩ 古佛 맹사성 - 빼어난 학식과 덕마응로 구세제민의 경륜 떨쳐

▲ 고불 맹사성 영정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은 황희(黃喜) 정승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치세를 도와 조선왕조 초기에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이요 청백리였다.

그는 벼슬이 정승에 올랐어도 청빈·검소하게 살았고, 음률에 정통한 음악의 달인이었으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멋과 여유로 슬기롭게 살며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긴 풍류 명사였다.

조선왕조 500년간 정승을 지낸 사람은 많지만 성이나 아호 뒤에 ‘정승’을 붙여 부르는 이는 대체로 네 명밖에 없다. 그 네 명은 맹 정승을 비롯하여 황 정승(황희), 상 정승(상진), 오리 정승(이원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식과 덕망이 빼어났고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쳤다는 점, 모범적인 청백리라는 점, 그리고 민족 고유의 멋과 슬기인 풍류 정신으로 한평생을 보냈다는 사실 등이다.

맹 정승이 남긴 풍류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높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게 평소 말이나 가마 대신 ‘기린’, 또는 ‘기리마’라고 부른 검은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

어느 해 한식, 고불은 온양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기리마를 타고 어슬렁거리며 용인 땅을 지나는데 갑자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던 빗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어느새 소나기로 변했다. 할 수 없이 주막으로 찾아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처마 밑에 기리마를 매어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선비 하나가 이미 아랫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본래 검소하여 좋은 옷을 입지 않았고 시골 노인처럼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던 차에 옷까지 비에 흠뻑 젖었기에 고불은 문가에 앉아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하인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던 아랫목의 젊은 선비가 심심했던지, “노인장, 이쪽으로 오셔서 편히 앉으시지요.”하고 권하는 것이었다. 젊은 선비는 영남 사람으로 서울에 과거 시험 보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풀이삼아 장기를 두었는데 승부는 번번이 맹고불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선비가 이번에는 묻고 대답하는 말끝에 ‘공’자와 ‘당’자를 달아서 누구의 말문이 먼저 막히는가 보기로 했다. 먼저 맹고불이 시작했다.

“서울에는 무엇 하러 가는 공?”
“녹사 시험 보러 간 당.”
“내가 합격시켜 줄 공?”
“에이, 놀리는 건 옳지 않 당.”

그러는 사이에 날이 개여 두 사람은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맹 정승이 공무를 보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녹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인사를 하러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며칠 전에 만난 그 선비였다. 맹 정승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 공?”

그러자 젊은이는 자신이 인사하러 온 우의정이 바로 며칠 전에 만난 허름한 옷차림의 그 촌로인지라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려 대답하기를, “죽어 마땅하옵니 당!”했다고 하니 그 젊은이도 풍류의 멋을 아는 선비였던 모양이다.

어찌된 영문인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맹 정승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자 모두가 배꼽이 빠져라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 음력 7월 17일 개경에서 맹희도와 흥양 조씨 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신창. 신창 맹씨의 시조는 맹자의 51세손으로 고려 희종 때에 문하시중을 지낸 맹리요, 고불은 그의 4세손이다.

맹사성은 고려조가 기울어가는 때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우왕 12년(1386) 27세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로 벼슬길에 올라 이후 33세까지 여러 하급 관직을 맡았는데, 그 사이에 큰 정변이 일어났다.

1388년에 야심만만하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여 임금을 마음대로 갈아 치우고 최영(崔瑩)·정몽주(鄭夢周) 등 충신들을 잇달아 숙청한 뒤 1392년 마침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태조로 등극한 것이었다.

▲ 맹씨 행단 들머리의 '고불시조비'. 왼쪽 뒤편 건물은 맹씨 일가 효자정문이다.

이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새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자 맹희도는 아들에게 출사하여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권했다. 그렇게 하여 새 정부의 벼슬살이를 시작한 맹사성은 태종 6년(1406) 8월에는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벼슬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황희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조와 태종의 측근으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질시를 받았고, 특히 청렴강직한 성품대로 공무를 집행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죽을 뻔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

1419년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다. 고불은 세종의 조정에서 이조판서로 입각하여 68세가 되던 세종 9년(1427)에 마침내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같은 날 황희는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세종 13년(1431) 9월 황희는 영의정으로, 맹사성은 좌의정으로, 허조는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세 사람은 힘을 합쳐 세종의 치세를 뒷받침했다.

고불은 풍류객답게 가끔 틈을 내 낚시도 즐겼다. 어느 날 온양에 내려갔다가 머리를 식힐 겸 가까운 세교리의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다가 그 마을에 사는 전 첨지라는 노인을 만났다.

낚시를 좋아하는 두 사람은 곧 통성명을 했는데, 고불은 자신이 ‘중리에 사는 맹 첨지’라고 했다. 나란히 앉아 낚시를 즐기다가 두 사람은 고불이 싸가지고 온 보리개떡을 점심으로 나누어 먹었다. 날이 저물어 헤어지면서 고불은 아무 달 아무 날이 내 생일인데 별로 먹을 것은 없겠지만 놀러오라고 청했다.

▲ 맹 정승의 유물. 오른쪽 위가 포도무늬 벼루. 아래가 평소 아끼던 옥피리. 왼쪽 옥비녀는 부인 철원 최씨의 것이다.

그런데 전 첨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므로 맹 첨지의 생일이 오자 고민이 되었다.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는데 마땅한 선물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다 못해 맹 첨지가 좋아하는 보리개떡을 만들어 싸들고 중리로 찾아가 사람들에게 맹 첨지 댁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맹 첨지의 집은 예상과는 달리 보잘 것 없는 초가가 아니라 커다란 기와집인데, 그 앞에 여러 채의 수레와 가마와 여러 마리의 말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고불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생일을 축하하러 온 고관들에게 낚시친구 전 첨지를 소개했다. 그때서야 낚시터에서 만난 맹 첨지가 바로 유명한 맹 정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 첨지가 전날의 무례를 백배사죄했다. 그러자 고불이 말했다.

“이보오, 전 첨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오. 내 비록 벼슬이 정승이라고는 하나 만백성이 내 벗이 아니겠소? 그러니 사죄니 뭐니 하는 말은 말고 앞으로도 자주 함께 낚시를 즐깁시다.”

이처럼 소탈하고 청빈 무욕한 고불인지라 벼슬이 정승이라도 집안은 늘 가난했다.

세종 17년(1435) 노령을 사유로 벼슬길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조용히 만년의 풍류를 즐기다가 3년 뒤인 세종 20년에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맹사성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직리 야산 기슭에 있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