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⑬ 평강공주

평강공주(平崗公主)는 고구려의 제25대 임금 평강왕의 외동딸이니 바로 온달(溫達) 장군과 짝을 이뤄 우리 고대사를 풍류 한마당으로 멋지게 빛내고 간 여걸이다.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에 실려 전해오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성은 고구려의 왕녀로서 고씨(高氏)란 사실이 분명하지만, 평강공주란 '평강왕의 딸'이란 뜻이지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강공주는 천대받던 하급무사 온달을 고구려 최고의 용장이 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여걸이었다. 사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이지만 귀족 출신도, 처음부터 장군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로맨스가 2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주는 것이다.

온달은 뭇사람에게 바보라고 놀림 받던 미천한 존재였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 민족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기인·재사는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듣고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간 사람이 온달 장군 말고 누가 또 있었던가.

어렸을 때 '울보 공주'로 유명했던 평강공주와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던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무슨 까닭에 잘 울었으며, 온달은 어찌하여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공주의 신랑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을까.

당시 동북아 최강국으로서 중국의 숱한 하루살이 황제쯤은 우습게 여기던 대고구려의 공주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서 저자를 헤매며 동냥하던 바보 온달에게, 그것도 제 발로 찾아가 아내가 되었을까. 과연 이러한 일이 절대왕권 시대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우는 버릇이 있었다. 걸핏하면 앙앙 소리치며 울어대니 대왕의 걱정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이 이런 말로 공주의 울음을 달래었다. "오냐, 오냐, 그렇게 자꾸만 울기만 한다면 이 다음에 커서 좋은 신랑에게 시집가기는 다 틀린 줄 알아라.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한다면 저기 저자를 헤매며 비럭질하는 바보 온달이란 녀석에게 시집보내고 말 터이니라!"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왕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바지, 바보 온달이 누구야요?" 아마도 온달이란 이름을 처음 듣기에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달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통하게도 공주의 울음이 뚝 그쳤던 것이다.

그때 평양성에는 매우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으니 늙고 눈먼 홀어미는 성도 이름도 없었고,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그의 아들은 온달이라고 불렸다. 이들 모자는 매우 가난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몹시 가난하여 날마다 저자를 헤매며 밥을 빌어 노모를 봉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속마음은 순박했지만 얼굴이 멍청하게 생겨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공주의 나이 꽃다운 열여섯이 되었다. 공주가 어여쁜 처녀로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대왕은 혼처를 물색했다. 사건은 공주의 혼사 이야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부왕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공주가 울며불며 이렇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바지! 소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시겠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와요? 소녀는 골백번 고쳐 죽어도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겠사와요!"

난데없는 공주의 생떼에 대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공주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겠다니, 그렇다면 네가 이미 점찍어둔 사내라도 있다는 말이냐 뭐냐?"
"아바지께서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르지 아니하셨어요? 네가 자꾸 울기를 좋아하니 이 다음에 크거들랑 바보 온달의 각시로 주마고 아니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시겠다면 그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소녀는 죽어도 온달을 낭군으로 섬기고자 하나이다!"

그제야 대왕은 공주의 말이 실없는 농담도, 단순한 생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같이 노해 대궐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쳤다.

"예끼, 천하에 고약하고 발칙하고 무엄한 간나(계집) 같으니라구! 너는 대고구려 왕녀가 아니냐? 그럼에도 미천한 거렁뱅이의 각시가 되겠단 말이냐?"
"대왕께서 하신 말씀이오니 더욱 중하지 않사와요? 저자의 이름 없는 필부도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온데, 하물며 대왕께옵서 어찌 거짓말씀을 하시오리까? 소녀는 대왕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더욱더 온달에게 시집가고자 하나이다!"

말꼬리가 잡힌 데다 말문까지 막혀버린 평강왕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분노에 못 이겨 냅다 고함을 질렀다.
"고얀 년! 넌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다! 너 같은 것은 애당초 낳지도 않은 것으로 칠 터이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거라!"

그렇게 하여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때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지니고 대궐을 나왔다고 했으니 이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이 부족하여 공주의 신분도 버리고 부왕의 내침을 자초하여 대궐을 등졌을까.

추측컨대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넓디넓은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평강왕에게는 부인이 두 명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공주의 생모는 제1왕비로서 일찍 돌아갔고, 계모인 제2왕비가 어머니 자리를 차지하자 매일같이 떼쓰고 울면서 자랐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열전'은 공주가 홀로 궁에서 나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어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온달과 함께 살게 되었다.

어쨌든 '바보' 온달은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쳐 비록 몰래 한 결혼이지만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되었다. '바보' 온달의 행운을 그 누가 따를 수 있었으랴. 공주는 출궁할 때에 가지고 나온 금팔찌며 보석을 팔아 집과 땅과 노비와 소 따위를 사들여 집안을 새롭게 일으키고 가꾸었다. 그리고 온달에게 열심히 무술을 익히게 했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에서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대왕이 친히 주재하는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북주와의 전쟁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워 마침내 평강왕의 눈에 들어 사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온달은 고구려에 없어서는 안 될 명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 모두가 부인인 평강공주의 적극적인 내조 덕분이었다.

고구려는 평강왕 28년(587)에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고,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 뒤인 서기 590년 10월에 평강왕이 재위 32년 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곧 영양왕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등장하여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칫거리였다.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 문제였다.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영양왕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보회의를 개최했다. 그날 어전회의는 온달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온달이 신라 원정 길에 숨지자
평강공주도 애통해 하며 죽어 합장
신분을 초월한 그들의 사랑은
세월을 넘어 아직도 큰 감동으로…

대궐을 물러난 온달은 이튿날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맹세했다.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다 물리지 못한다면 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노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하여 질풍노도처럼 남진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렀다. '열전' 온달 편은 이렇게 전한다.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아단성은 지금까지는 서울 아차산성이란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했다.

그러나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영춘면에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성이 있다.

현재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활고개, 진거리, 쉬는돌, 비마루, 대진목, 군관나루 같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열전'은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아아, 돌아갑시다!" 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했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이는 온달이 고토회복의 한을 품은 채 전사하자 너무나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일 것이다.

또한 '조선사략'이란 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려온 평강공주가 관머리를 부여잡고 "국토를 못 찾고야 어이 홀로 돌아가리오! 님이 아니 돌아가는데 나 또한 어이 홀로 돌아가리오!" 하고 애통하게 울부짖다가 쓰러진 채 영영 깨어나지 못하자 군사들이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내외를 그 자리에 합장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최근 단양군에서 온달묘라고 주장하며 관광자원화하려는 온달성 인근의 고구려식 적석총이 어쩌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 맞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북한에선 평양 동명왕릉 부근 진파리4호무덤을 평강공주·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대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장군의 풍류적 시정 넘치는 진정한 사랑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