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⑭ 토정 이지함 (上)

▲ 토정 이지함 동상, 충남 아산시 인주면 면사무소 앞뜰에 있다.
본명보다도 ‘토정비결’의 작가로 더 잘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은 우리나라 풍류사에서 신비로운 발자취를 남기고 간 기인이사(奇人異士)였다.

‘재물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재앙이 따르는 법’이라면서 한평생 청빈무욕하게 보낸 토정 이지함, 그는 유학(儒學)은 말할 것도 없고 천문·지리·음률·산술·의술·점복·관상 등 여러 방면에서 비상한 재주를 지녔으나 박학다식을 뽐내지도 않았고 벼슬자리를 탐내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지·기행으로 한 삶을 일관한 토정은 먼 앞날을 미리 내다본 비범한 예언가요 서민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경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시대를 훨씬 앞서간 실학사상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만년의 짧은 관직생활을 통해서는 오로지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친 청백리이기도 했다.

평생토록 가난을 재미삼아 살아왔으므로 종6품에 불과한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잠깐 맡았던 것도 결코 재물이 탐나거나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위해 남은 힘이나마 한번 쏟아보고 가겠다는 순수한 인간애·동포애의 발로였을 것이다.

토정이 그렇게 하기 싫던 벼슬길에 나선 것은 56세 되던 해인 선조 6년(1573) 봄. 포천현감이 되어서였다. 이미 마음속으로 작정한 바가 있었으므로 토정은 일부러 남루를 걸치고 짚신 신고 죽장 짚고 걸어서 포천에 부임했다.

마침 저녁 때였으므로 관노가 음식을 차려서 올렸다. 토정이 물끄러미 밥상을 내려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아전이 뜰 아래서 이 말을 듣고 몸 둘 바를 몰라 이렇게 아뢰었다.
“궁벽한 시골이라 변변한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
아전은 진수성찬을 차려 다시 올렸다. 토정이 여전히 밥상을 내려다보더니 똑같은 말을 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육방관속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며 지은 죄도 없는데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속으로는 된통 까다로운 사또를 만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잘 차린 음식을 보고도 먹을 것이 없다니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재물을 긁어모으려는 탐관오리로 오해했던 것이다. 이윽고 토정이 입을 열어 이렇게 타일렀다.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생활이 넉넉지 못한 데도 음식에 절제가 없고, 또 앉아서 편히 먹기를 좋아하니 큰일이다. 나로 말하자면 음식을 상에다 차려서 먹는 것조차도 과분하게 여기는 바이니라.”

그리고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만 내오게 하여 맛있게 먹었다.

걸인청은 400년 전의 새마을사업본부

토정 이지함은 또한 400년 전에 이미 이 땅에서 잘살기운동·새생활운동·새마을운동을 실천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토정이 ‘걸인청(乞人廳)’을 세운 것은 아산현감 때였으나 포천현감 시절에도 그와 비슷한 집을 지어 빈민들을 거두어 각자 생업을 주선하여 새 삶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포천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에 백성을 위한 건의를 했으나 조정에서 받아주지 않자 미련 없이 현감 직을 내버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가 아산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선조 11년(1578)이었다. 토정은 고을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뜻밖에도 거지가 매우 많은 데 놀랐다. 거지뿐 아니라 늙고 병들어 벌이도 못한 채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걸인청이었다. 그러자 아전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반대를 했다.

“사또! 거지새끼들은 모조리 쓸어다가 아산 바깥으로 내쫓아버리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무슨 까닭에 걸인청을 만들어 우리 고을을 거지소굴로 만들려고 하십니까요?”

토정이 목청을 가다듬어 아전들을 꾸짖었다.

“어허, 고얀 놈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따뜻이 보살펴주는 것이 수령의 본분이 아니더냐? 내가 걸인청을 세우려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 양민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과 땅을 갖게 하여 잘살게 하려는 것이니라. 너희가 건물이 없다느니 재물이 없다느니 핑계를 대지만 건물은 세미(稅米)창고를 비워서 수리하면 될 것이고 재물은 한 해 동안만 먹여주면 자립할 방도가 마련될 것이 아니겠느냐?”

▲ 걸인청 건물. 여민루 앞에 있었으나 최근에 헐려 없어져버렸다.

그렇게 걸인청을 만든 토정은 관속을 풀어 고을 안의 거지들을 죄다 잡아들여 수용하고 일을 시켰다. 노약자와 병자들은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는 쉬운 일을 시켰고, 젊고 튼튼한 거지들은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시켰다. 그 밖에 손재주가 좋은 자들에게는 도구를 마련해주고 수공업에 종사토록 했으니, 이야말로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산 교훈에 다름 아니었다.

토정 이지함의 본관은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세손으로 중종 12년(1517) 음력 9월 20일 수원판관을 지낸 이치(李穉)와 광산 김씨의 막내아들로 외가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지영(之英)·지번(之蕃)·지무(之茂) 세 형이 있었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둘째형한테 글을 배웠다.

뒷날 영의정에 오른 이산해(李山海)의 부친인 지번은 글뿐 아니라 토정의 인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유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에도 정통했으며, 명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단양 구담에 은둔하며 신선술에 몰두했다.

늘 털이 검은 소를 타고 강변을 돌아다녔으며, 구담 양쪽 절벽에 칡덩굴로 밧줄을 만들어 가로질러 놓고 거기에 오늘날 케이블카 같은 ‘비학(飛鶴)’을 매달아 타고 오르내렸으므로 사람들이 신선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토정의 풍류정신과 실용주의 사상은 이런 둘째형의 감화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 밑에서 자란 토정은 정종(定宗)의 증손인 이성랑(李星琅)의 딸과 혼례를 올렸는데, 한강변에 진흙을 개어 10여 척 높이의 흙집을 짓고 살았다.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집 위에 올라가 한강을 오르내리는 돛배들을 바라보거나 ‘주역’을 읽으며 지내니 그 집을 가리켜 사람들이 ‘토정’이라 불렀고 자신도 또한 그것을 아호로 삼았다. 그 토정이 바로 지금 서울 마포구 토정동의 지명이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