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빛나는 황폐함

“철수는 밤 아홉시에 전화를 하고 그리고 열한시에 또 전화를 했다. 첫 번째 전화는 보고 싶었다, 오랜만이다, 이 전화번호를 가지고 다녔다, 지금 신촌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내용이었고 두 번째 전화는 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 술을 마셨다, 너를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겠다, 미안하다, 그랬다. 두 번 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너 없이도 나는 십 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 삶의 도식성과 도덕적 우월감. // 철수는 나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떠났다. 나는 빈곤감에 시달렸다. 나도 그런 것이 갖고 싶었다.”

이러한, 결코 흔한 종류라고는 할 수 없는 ‘작가의 말’로 시작되는 한 소설은 어떠한가.

소설의 제목은 <철수>, 작가의 이름은 배수아(1965- ). 그 작가의 말이 실제로 작가에게 일어난 일인지, 이어지는 소설의 내용과 특별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 남자 ‘김철수’의 이름이 정말 ‘김철수’인지, 일반적인 독자라면 궁금해 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것들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배수아 소설’에서라면 그렇다.

우리는 소설의 성격을 규정하는 많은 단어들을 알고 있다. 연애소설, 성장소설, 풍자소설, 후일담소설 등등 - 그러나 그 중 어떤 용어도 <철수>를, 나아가 배수아 소설의 일반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소설에 연애, 성장, 풍자, 후일담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자신이, 혹은 자신의 소설이 어떠한 틀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배수아는 충분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배수아가 ‘의도’나 ‘성공’이란 말에 회의를 품지 않을 리도 없다.

대부분의 우리는 1990년대라는 시대를 통과해왔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떤 정의와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90년대는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입체’의 개념이 등장한 시대다.

‘입체’라는 말은 곧 ‘다중(多重)’, ‘다각(多角)’, ‘다원(多元)’의 의미를 가진다. 건국 이래 수십 년 동안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는 모두 가파른 기울기의 상승 그래프로 달성되어야만 하는, 그 자체로서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 평면적이고 획일적인 목표달성의 이데올로기들은 조금씩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으나 무엇보다 자가당착의 측면이 강했다.

어느 정도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하더라도 예의 이데올로기들이 양산해낸 극단적인 모순과 부조리는 병적일 정도로 복잡하고 기괴한 양상을 띄어갔다. 그 퇴색의 순간에 ‘개인’, ‘일상’, ‘욕망’, ‘육체’ 등의 화두가 처음으로 사회 전반에 등장했다.

배수아 소설을 90년대라는 맥락 속에서 읽으려는 시도는 분명 타당해 보인다. 비단 배수아뿐만 아니라 90년대 등장한 다수의 젊은 소설가들이 신세대 작가군(群)을 형성하며 기존의 한국문학이 다루었던 것과는 차별되는 다양한 주제, 문체, 내용, 형식 등을 작품 속에 선보였다.

그러나 90년대라는 성긴 그물망만으로 작가 배수아를, 그녀의 소설을 온전히 건져 올리기란 불가능하다. 배수아가 가진 개성은 한국 근대 문학에서 그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임에 분명하다.

작품 속에서 그녀가 묘사하는 불모지와도 같은 현대인의 삶, 소통과 교감의 실패, 애정과 신뢰의 부재, 기만적인 희망에 대한 환멸과 냉소, 전통적인 가치와 교훈에 대한 불감과 부정.

특유의 냉담하면서도 건조한 문체로 기괴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존재의 비루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배수아의 소설은 뜨거운 얼음 혹은 차가운 불이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열망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다. 함부로 그러하지 않는다.

“나쁜 것은, 매력적이고 진지하고 치열하고 강하다. 인생을 오래 살게 되면 그런 것이 눈에 보이지. 그리고 그런 병은 절대로 낫지 않는 거야.”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배수아의 작가적 개성이나 그녀의 소설이 가진 특징은 종종 위악의 포즈로 오해받아 악의적인 비판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위악의 포즈가 아니다. 그녀가 그려내는 황폐함은 적어도 피상적이지 않다. 섣부르지 않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까운 무엇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혹독한 공허가 있음을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많은 경우 그것은 부정된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삶의 태도로 권장된다.

공허를 진실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수아는 그런 식의 타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작가다. 본질적인 황폐와 공허를 외면하고 교묘히 기만적인 긍정과 희망을 찾는 것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인위적인 위선의 포즈인 것이다.

“너는 너무 차가와 절망감에 몸이 떨릴 지경이다. 너의 입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달아오르지 않고 너의 몸은 미끈거리는 얼음 같다.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감동을 느낀 적이 없는 늑대소녀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 너의 심장에 귀를 가까이 가져가보면 텅 빈 허공에 바람소리만이 들린다.”

유령이나 박제를 대할 때 느껴지는 섬뜩함, 혹은 궁핍감 - 그러나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들이 문득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지 않은 존재만이 얻을 수 있는 고독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순간, 황폐한 존재는 차갑게 빛난다.

<철수>의 등장인물 김철수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다. ‘철수’는 존재의 황폐함을 애써 외면해버린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의 마지막 부분, ‘삶의 도식성과 도덕적 우월감. 철수는 나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떠났다. 나는 빈곤감에 시달렸다. 나도 그런 것이 갖고 싶었다’는 결코 동경이나 소망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스스로 기꺼이, 영원히 빈곤감에 시달리기로 선택한 것이다.

“나는 늦은 밤 사무실 의자에 깊숙이 앉아 Barefoot을 열세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정확히 열세 번이다. 열시가 되면 건물 전체가 소등되고 강물에 가라앉은 별처럼 반짝이는 차들의 불빛이 어느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Barefoot을 들으면서 나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 살아난 시체처럼 벌떡 일어나 어두운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