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문명왕후 김문희

신라 시대에 비단치마 한 장으로 언니의 꿈을 사서 왕비가 된 여인이 있었으니, 앞날을 내다본 투자치고는 참으로 과감한 투자였다.

이 대담한 투자가가 바로 태종무열왕의 왕비요 문무왕의 모후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金文姬)로서, 그는 또한 신라의 대표적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김문희는 고대 여성으로서는 매우 활달하고 진취적이었다. 문희가 언니 보희(寶姬)의 꿈을 사서 뒷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간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고, <화랑세기>에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활달하고 진취적인 여걸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즉위년(661) 조는 이렇게 전한다.

-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니 그의 이름은 법민(法敏)이요,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이니 소판 서현(舒玄)의 막내딸이며, 유신의 누이였다. 그 맏누이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오줌이 흘러서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을 깨어 동생과 더불어 꿈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이 장난의 말로,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소” 하고는 비단치마를 값으로 쳐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마침 우리 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하고 곧 함께 집으로 가서 술자리를 벌이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느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라 했더니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아우가 앞에 나와 꿰매어 달았다. 그의 수수한 단장과 날씬한 의복에 환하게 핀 어여쁜 얼굴은 눈이 부실 듯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곧 혼인을 정하여 성례를 하매 뒤미처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으니 이가 법민이다(…). -

한편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춘추공 조의 기록은 이보다 더 상세하며, 일부 다른 내용도 있다. 그 기록은 이렇다.

-(…)유신이 아해(阿海:보희의 아명)를 시켜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주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런 하찮은 일로 함부로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하고 사양했다. 그래서 아지(阿之:문희의 아명)에게 명했더니 춘추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그와 관계하여 이로부터는 자주 내왕하게 되었다. 유신이 그의 누이가 아이를 밴 것을 알고 그를 나무라며, “네가 부모에게 말도 없이 아이를 뱄으니 웬일이냐?”하고는 곧 서울 안에 소문을 퍼뜨리고 그 누이를 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루는 선덕여왕이 남산에 놀러나가는 틈을 타서 장작을 마당 한가운데 쌓고 불을 질러 연기를 올렸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었다. 근신이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그 누이를 태워 죽이는 모양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아이를 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것이 누구의 소행이냐?”라고 물으니 이때 마침 춘추공이 측근에서 모시고 있다가 안색이 사뭇 달라졌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네 소행이구나! 빨리 가서 구해주어라!”고 했다. 춘추공이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해 이를 말렸으니 이로부터 버젓이 혼례를 치렀다. -

그런데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보면 김춘추는 당시 본부인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있어서 문희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유신이 문희를 태워 죽이려고 하자 선덕공주가 연기를 보고 김춘추로 하여금 그 목숨을 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문희는 얼마 뒤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 기록에 따라 이 사건 당시 선덕여왕의 신분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여왕이 아니라 공주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가 632년인 반면, 김춘추와 김문희가 결혼한 것은 그 이전인 626년께의 일이기 때문이다.

보희는 이처럼 그저 웃어버리고 지나갈 수도 있는 언니의 꿈 이야기를 듣고 이를 당시로서는 매우 고가의 수입품인 비단치마를 주고 사들일 만큼 총명과 예지가 대단한 여인이었다.

온 나라를 흠뻑 적실 오줌을 눈 꿈은 예사로운 길몽이 아닌 것이다. 언니가 그런 비범한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자 문희는 그 꿈이 귀한 신분이 될 꿈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문희는 미래를 보고 과감한 승부수를 띄웠고, 결과적으로 그 투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김춘추는 당시 총각도 아닌 유부남이었다. 그래서 문희를 여러 차례 건드려 임신을 하자 나 몰라라 하고 꽁무니를 빼려 했던 것이다. 플레이보이 김춘추가 배신하려는 눈치를 보이자 김유신이 비장의 카드를 뽑아든 것이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는 시위였다.

이 사건은 김유신이 신분상승을 위해 혼자서 꾸민 일인가. 아니면 진평왕의 승인 아래 시행된 선덕공주의 후계자 굳히기를 위한 포석의 하나였던가.

망국 가야의 왕손으로 새로 신라의 진골로 편입된 김유신 계통의 김 씨들을 가리켜 이른바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렀다. 신김씨들은 그렇게 하여 선덕공주의 튼튼한 방패가 됨으로써 그녀의 여왕 즉위에 큰 힘이 되어주었고, 또한 뒷날 몰락한 왕족인 김춘추로 하여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신분상승 노린 정략결혼

김유신이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가 된 것은 18세 때였다.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후광으로 풍월주가 되기는 했지만 가야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신분상승에는 제약이 있었다.

아버지 김서현이 제3위 소판 벼슬에 그친 것은 그의 가문이 쇠락해지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 누이동생을 왕족인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는 모험이었다.

김춘추는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서 김유신보다 9세 연하였다. 하지만 김춘추에게는 이미 본부인인 보량이 있어서 이 외도사건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이 잘 안 풀리자 김유신이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나섰고, 선덕공주의 개입으로 일이 잘 해결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문희를 둘째부인으로 맞아들였고, 얼마 뒤 보량이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실부인이 되었다.

한편 동생에게 꿈을 판 보희는 이를 후회하여 시집을 가지 않다가 김춘추의 첩이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길몽을 판 탓에 첩의 자리에 앉게 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유신은 마침내 신라 왕실과 인척관계가 되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발판삼아 가야 출신이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권력의 서열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진덕여왕이 죽고 성골의 대가 끊어져버렸으므로 진골인 김춘추가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했다. 김유신이 무력을 앞세워 김춘추를 왕위에 앉힌 것이니 이들 처남매부는 참으로 환상의 콤비였다.

비록 언니의 꿈을 산 것이기는 했지만 문희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졌던 것이다. 꿈을 사서 자신은 왕비가 되고, 오라비는 신라의 군권을 장악했으니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없었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