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 / 심경호 지음 / 한얼미디어 발행 / 1만 3,000원

옛 선비들이 편지를 일컫는 말은 무수히 많았다.

일반적으로 쓰인 서신(書信)·서한(書翰), 죽간에 쓴 간(簡), 목편에 쓴 독(牘)·찰(札), 종이에 쓴 전(箋), 봉투를 사용한 함(函), 엽서를 뜻하는 우서(羽書), 윗사람이 쓴 간서(懇書)·방묵(芳墨), 신료가 군주에 아뢰는 표주(表奏), 자신의 것을 낮춰 이르는 소간(小簡)·우서(愚書)….

그 중 간찰(簡札)은 본래 죽간과 목찰에 쓴 글이란 뜻이지만 보통의 편지를 우아하게 부르는 말로 널리 쓰였고, 최근 들어서는 고인의 필적이 남아 있는 것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 쓴 <간찰>은 고려부터 조선 말기까지 선인들이 한문으로 작성한 편지글 27편을 추려 번역과 해설을 곁들인 책이다.

연대기 순으로 배열된 간찰을 남긴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적 업적이나 문예적 성취, 명문장으로 후대에 이름을 드날린 인물들이라 첫눈에 독자의 흥미를 끈다. 이규보, 정몽주, 김시습, 이황, 이이, 허균,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이 그러하다.

요즘에 비해 통신 수단이 열악했을 당시를 짐작해 보면 편지는 일차적으로 유용한 정보 교환의 도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유려한 문장으로 작성된 간찰을 읽어가다 보면 옛 사대부들이 편지지에 붓으로 흘려 적은 것은 단순한 소식이나 안부 이상임을 깨달을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흐트러지지 않은 격식 속에 담긴 문학적 운치이다. 선인들은 자기 주변의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고하기보다는 중국의 고사를 빗댄 표현을 곳곳에 배치하면서 품격있는 글을 완성한다.

그 자체로 완결된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욕구 너머에는 편지를 그저 통신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상대와 교유하는 장으로 삼으려는 옛 지식인의 태도가 엿보인다.

설령 받는 이에게 무언가를 청탁하려 할 때도 바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풍류 넘치는 문장들 속에 슬쩍 끼워넣는 쪽을 택한다.

박지원이 출중한 학식을 고집스레 감추는 이덕무에게 “그대는 몸을 잘 감추고 먹물을 잘 먹으며 언제나 자신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이덕무의 호 영처(處)를 풀이한 말) 섭구벌레”라고 희롱하며 띄운 간찰에서는 체면이나 허례와 얽매이지 않고 친한 벗에게 활짝 연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하는 모든 서신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벗에게 보낸 것이다. 그 덕에 독자는 선인들이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사상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행간에서 손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우선 선비의 교유에 있어 술과 시는 빼놓을 수 없는 매개임을 알 수 있다. 이규보·허균을 비롯해 많은 발신자들은 제 집에 술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으니 내방해서 시 짓기 놀이를 즐기자며 벗을 유혹한다.

적지 않은 글에서는 속세를 등지고 유교적 덕목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처사의 삶’과 공동체를 위해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경세의 삶’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한편 죽은 자를 회고하는 자세는 오늘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다. 정약용은 오랜 벗의 죽음을 맞아 "그가 흠향하고 좋아함이 여타의 안주와 반찬 따위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윤지범에게 시를 지어 제사를 올리자고 제언한다.

꼼꼼한 고증을 통해 되살린 옛 편지글 각각에 저자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동원해 풍성한 인물 열전을 곁들였다. 이로써 독자는 간찰이 쓰여진 배경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이해해 보는 지적 즐거움을 덤으로 누릴 수 있다.

단, 고전에 대한 이해가 웬만큼 깊지 않거든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재혼이 '끊어진 거문고의 줄을 잇는다'는 뜻의 속현(續絃)이라 표현되는 등 일상에서 쉬이 접하지 못할 한자 어휘가 많은 까닭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