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엊그제만 해도 봄 햇살이 그저 좋기만 하여 쫓아다녔는데, 문득 강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제법 무성해진 나뭇잎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을 그리워지는 여름이 어느새 봄을 밀어내고 곁에 다가온 듯하다.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라도 길게 하고 싶어 등나무 아래로 들어가면, 이번엔 환한 연보라빛 꽃송이들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늘어져 반긴다. 정말 아름다운 등나무 꽃송이들이다.

5월을 볕 아래서, 아니 그 볕을 가리고 피어나는 등꽃은 아직은 여린 녹둣빛 잎새와 어울려 사랑스럽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몸을 친친 휘감아 올라가는 그 줄기의 생명력엔 웅장함마저 느껴진다.

등꽃이 피는 이 계절에 등나무 곁에 서면 나른한 봄 기운에 꽃향기가 묻어난다. 은은하면서도 깔끔한 등꽃 향기의 뒷맛은 진하고 달콤한 아까시나무꽃 향기와는 그 격이 사뭇 다르다,

등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이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 문자이다. 등나무는 원줄기가 특히 길게 뻗어 나와 많은 가지를 만들며 다른 물체를 감고 큰다.

흔히 보는 참등은 지주목을 오른쪽 방향으로 감고 올라간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쪽 방향으로도 감고 올라간다. 이 줄기에서 봄에 잎과 꽃이 함께 자라기 시작하는데, 꽃대가 다 자랄 즈음에 잎도 봄볕에 반짝이는 보송한 솜털을 벗어버리고 푸르러지기 시작한다.

등나무 잎은 잎자루 하나에 작은 잎을 여러 개 달고 있는 복엽이다. 꽃대는 가지 끝이나 잎과 줄기 사이에 위치한다. 한껏 자란 꽃대는 30cm가 넘고 연자주색 꽃이 수없이 많이 달린다.

꽃을 따서 좀 더 자세히 보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생긴 꽃잎은 연자주색, 또 그 밑으로 황록색이 돌고 안쪽으로는 짙은 자주빛이 보인다. 그러나 백등은 흰꽃을 피운다. 이를 흰등이라고도 하며 그 향기가 유난히 진하다.

등나무의 쓰임새는 역시 시원한 꽃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원수로 으뜸이다. 한여름 도심에서 등나무 그늘보다 더 좋은 휴식처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등나무는 쉽게 자라므로 지주목을 세워 몇 그루 심으면 몇 해 안에 무성한 등나무 그늘이 생겨난다. 우리나라 전통정원 양식으로 꼽히는 전라남도 담양군의 소쇄원이나 강진군의 다산 초당의 정원에 등나무가 심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이 나무가 풍류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오래 전 일이라 생각된다.

그 밖에도 등나무는 그 용도가 다양하다. 어린 잎이나 꽃을 무쳐 먹는데 특히 꽃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등화채라는 꽃나물이 있어 별미다. 씨앗은 흔히 볶아 먹는다.

적절한 두께의 덩굴은 바구니를 만드는데 쓰이기도 하고, 질긴 나무껍질은 새끼를 꼬거나 키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일부에서는 여름에 등나무의 덩굴을 가늘게 쪼개 ‘등거리’라는 시원한 속옷을 만들어 입기도 한다. 또 묘하게 꼬인 줄기로 만들어진 등나무 지팡이는 신선이 짚고 다는 것이라 하여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요즈음 고급가구로 팔리는 이른바 등가구는 이 등나무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열대 지역에서 ‘라땅’이라고 불리는 덩굴 식물로 만든 가구이다.

우리나라엔 유명한 등나무들이 있는데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천연기념물인 경주 오유리의 등나무가 특히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부산 동래 범어사의 뒷산 금정산 산허리께에 가면, 계곡 물이 흐르고 큰 바위가 드러난 곳에 수많은 등나무 군락이 장관을 이루는데 계곡의 이름마저 등운곡(藤雲谷)이다.

함부로 갈 순 없지만, 서울의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도 천연기념물 254호로 지정된 등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등꽃이 지면 봄도 간다. 봄바람에 등꽃비 내려 등나무 시렁 아래의 긴 걸상 위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애잔한 마음이 절로 든다. 여름의 등나무 그늘만 생각할 게 아니라 꽃이 다 지기 전 지금 등꽃 구경 한번 마음 놓고 해볼 일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