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作,

‘정치’ 못지않게, 아니 정치 이상으로 민감하고 다루기 곤란한 것이 바로 ‘종교’일 것이다.

헌법에 엄연히 정치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종교 모두 우리의 일상에 밀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때로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 무척이나 거북한 것이 된다.

특히 그것이 ‘나는(나의 정치적 태도나 종교적 신념은) 옳고, 너는(너의 정치적 태도나 종교적 신념은) 틀렸다.’ 식의 화법이 사용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대화의 분위기는 거북하고 심각한 것을 넘어 험악하고 적대적인 것으로까지 변질된다.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면 정치와 종교를 화제로 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에티켓이자 유용한 처세임을 사람들은 인지하고 있다.

유사 이래 인류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정답’을 제시한 정치나 종교는 없었다. 그 진리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진리가 온전히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해 보인다.

유사 이래 인류는 정치와 종교를 이유로 숱한 대립과 파멸을 경험했다. 잔혹한 살육과 참담한 재앙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비극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유사 이래 인류가 정치와 종교 때문에 흘린 피와 눈물은 지구의 모든 강과 바다로 흘러들었다. 정치와 종교에 대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식의 논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정치와 종교가 권위와 탐욕과의 결탁을 그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지구의 모든 강과 바다로 인간의 피와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무튼 거북한 ‘종교’ 얘기를 한번 해보려 한다. 교묘히 혹은 지혜롭게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의 함정을 피해가면서 말이다.

<불교가 좋다> -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우선 책의 제목이 <불교가 옳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다’와 ‘옳다’는 각기 품고 있는 우주가 다르다. 더구나 이 책은 전문적인 학술 서적이 아니며, <바이블>이나 <코란>, <금강경>이나 <화엄경> 같은 종교의 경전은 더더욱 아니다.

한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편견을 떠나 말하건대, 불교는 분명 ‘매력’적인 종교다. 역시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두 지성 가와이 하야오(1928- )와 나카자와 신이치(1950- )가 예의 불교의 매력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가와이는 ‘일본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임상심리학자로 ‘융 학파’의 세계적인 권위자이기도 하다.

그는 신화, 문학, 종교, 과학, 심리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수백 권의 저서와 역서로 펴냈으며, 교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일본 문화청 장관으로 재임하고 있다.

한국 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한일문화교류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아리랑’, ‘비목’ 등의 한국 민요와 가곡을 플루트로 연주한다고 한다. 국내에도 그의 저서가 여러 권 번역되어 있다.

나카자와 역시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로 일본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뒤 네팔에서 티베트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왕성한 학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 주오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교가 좋다>는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대담 기획물로 가와이와 나카자와가 불교에 대한 지식, 사유, 깨달음 등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상심리학자로 평생 인간의 ‘마음’에 대해 깊이 고민해 온 가와이는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던 마음의 문제를 불교를 통해 그 실마리를 풀어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를 두루 깊이 있게 연구한 나카자와는 자신의 학자적 관심과 애정이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에서 결론적으로 불교로 이동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그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은 식이다.

가와이 - (......) 결국 일신교의 계율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명령을 하죠. 그것도 절대적인 명령이죠. 따라서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은 죄악입니다. 벌을 받죠. 하지만 불교의 계율은 나카자와 선생이 말한 것처럼, 가장 잘 사는 법, 즉 살아가는 요령을 말해준다고나 할까요? 그때 ‘이건 안 돼’, ‘이쪽으로 가면 안 돼’, ‘저쪽으로 가서는 안 돼’ 하는 식으로 ‘안 돼’라고 말하며 인도를 해주죠. 계율의 의미가 서로 전혀 다르지요.

나카자와 - 불교의 계율은 왜 그토록 구체적일까 하는 수수께끼는 거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매뉴얼인 셈이지요.

가와이 - 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그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극락왕생에 실패하는 거죠.

나카자와 - 죄를 범하는 게 되니까 하지 말라는 식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똥통에 빠져,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식의 계율이지요.(......)

두 석학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불교가 ‘종교가 아닌 종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명령과 복종’이라는 극단적인 비대칭의 관계로 설정하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다’라는, 참된 진리를 통해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기인한다.

▲ 불교의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만다라.

인간은 신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불교는 ‘대칭’의 종교다. 대칭은 곧 ‘공존’을 의미하며, 그것은 오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구를 양분하여 대립하고 있는 크리스트교 문화권과 이슬람교 문화권 사이에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불교가 제시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카자와 - 이제 현대에 있어서 불교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붓다와 똑같은 삶이나 전략을 다시 한 번 실현하고자 한다면, 불교는 일신적(一神的)이며 초국가적인 거대 제국이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세계를 정복해가는 이 세계 안에서, 그런 것은 인간 정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그 속에 지혜가 생명력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와이와 나카자와는 서로의 학식과 인품을 존경하며 삼가듯, ‘불교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불교와 성(性)의 문제,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의 의미, 과학문명의 폐단에 대한 불교적 대안, 부정(否定)을 통한 불교적 성찰, 불교가 가진 현대성 등 그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옳다’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불교가 ‘좋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