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송강 정철 (上) - 당쟁 회오리에 휩쓸려 부침 거듭, 국문학사에 불멸의 업적 남겨

▲ '성산별곡'의 산실인 식영정.
-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어지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 가나… -

평생 술을 좋아했던 풍류가객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의 한 구절이다.

조선 선조 때의 사람인 송강은 당쟁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부침을 거듭한 정치적 풍운아였다. 타협을 모르고 융통성 없는 격렬한 성품은 서인의 영수로서 영욕으로 얼룩진 무상한 정치가의 길을 걷게 했지만, 그는 남달리 따스한 눈빛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때로는 꽃과 나무를 가꾸고, 때로는 낚싯대와 가야금을 벗 삼고, 또 그보다는 술을 더욱 즐겼던 정 송강,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준수한 자태에 도도한 언변으로 한 시대를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간 송강이야말로 우리나라 풍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인이었다.

송강은 구슬같이 영롱하고 별빛처럼 아름다운 수많은 시가를 남김으로써 국문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세운 위대한 문인이었다.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없는 국문학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의 문학작품이 빼어나고 값진 까닭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갈고 다듬어 더욱 빛낸 데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가사문학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순탄치 못한 벼슬살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걸작 대부분이 좌천과 유배와 은둔시절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정철은 중종 31년(1536) 음력 12월 6일에 현재 서울 자하문 밖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迎日鄭氏) 유침(惟沈)과 죽산 안씨(竹山安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태어날 때 부친은 영돈령판관이었고, 위로 자(滋), 소(沼), 황(滉) 세 형과 두 누이가 있었다.

큰누이는 인종의 후궁인 숙의였고, 작은누이는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다. 따라서 송강은 철부지 소년시절엔 누나를 만나러 대궐에 들어가서 자주 놀았다. 대궐에 들어가면 세자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소꿉친구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

그렇게 철없이 즐겁기만 하던 어린 시절은 어느새 지나가버렸다.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일어난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철의 매형 계림군이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계림군은 함경도 안변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때 송강의 부친은 사온령, 맏형은 이조정랑이었는데 죄인의 장인과 처남이라고 해서 잡혀 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계림군이 도망쳐 숨은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한 달이 넘게 부자가 함께 고문을 당하는데 계림군이 붙잡혀왔다. 고문 끝에 계림군은 없는 죄를 자백하고 능지처참 당했다. 그리고 정철의 부친은 함경도로, 형은 전라도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가을 양재동에 문정왕후와 소윤을 욕하는 괘서, 요즘으로 치면 대자보가 나붙어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몰아쳤다. 정철의 부친은 이번엔 경상도 영일로, 광양에서 귀양 살던 형은 함경도 경원으로 끌려갔다.

정철은 다정다감하고 감수성 예민하던 어린 시절을 그렇게 귀양살이하는 부친을 따라 함경도로 경상도로 오르내려야 했다. 그의 타협을 모르는 가열한 성품은 아마도 이때 형성된 듯하다. 부친이 풀려난 것은 명종 6년(1551). 정철이 16세 때였다.

그러나 형은 이미 유배지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벼슬길도 서울 생활에도 모두 환멸을 느낀 부친은 남은 가족을 이끌고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내려갔다.

담양서 10년간 학문연마, 풍류즐겨

▲ 충주 진천 송상사 경내의 송강시비. '사미인곡' 일부를 새겼다.

이곳에서 정철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눈에 들어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뒷날 그의 외손자사위가 되었다. 김윤제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종조부로서 그곳에 환벽당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철은 김윤제의 조카뻘이며 자신에게는 처외재당숙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과 함께 김윤제에게 글을 배우다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스승으로 모셨고, 이어서 고봉의 스승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한테서도 학문을 익히고 시를 배웠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대학자요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며 인품이 고매한 풍류고사였다. 정철은 기대승이 불과 9년 연상이지만 깍듯이 스승으로 존경하며 섬겼고, 기대승도 정철의 비범한 자질과 성품을 아껴주었다.

어느 날 기대승이 제자들과 더불어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갔는데 누군가가 물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인품이 이 경치에 비길 만한 훌륭한 이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기대승이 이내 이렇게 대답했다. “정철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정철이 성산(별뫼) 앞을 흐르는 맑은 시내 이름을 따서 송강이란 호를 지은 것이 그 무렵이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등과 교분을 맺은 것도 그 때였다.

16세부터 26세에 과거를 보기까지 10년간 정철은 이렇게 경치 좋은 산수 간에서 학문을 닦고 시문을 공부하며 꿈 많은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절이 정철의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명종 16년(1561)에 진사시에 합격한 정철은 이듬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순탄한 벼슬길은 얼마 못가고 그 뒤 5년간 하위직을 전전하는데, 1568년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당시 유학(儒學)은 퇴계(退溪)가 재야에서, 율곡이 조정에서 사림을 이끌던 황금기였으나, 망국적 당쟁도 그 무렵에 시작되었다.

융통성 없는 강직한 성품이 산 같은 화 불러

송강의 강직한 성품은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였다. 따라서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지적해야 직성이 풀렸고, 허물이 있으면 비록 절친한 친구든 벼슬이 저보다 높은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지적했다.

심지어는 임금 앞에서도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했고, 사사로운 부탁은 임금의 부탁이라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융통성 없는 성품은 결국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 뒷날 산 같은 화를 불러오게 된다.

송강은 또 술을 즐겨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지 못했다.‘술을 줄이고 말을 삼가라’는 동갑내기 율곡의 충고를 들을 만큼 술 때문에 실수도 많았고 일화도 많이 남겼다.

근무 중인 대낮부터 술이 취해 사모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적도 있었고, 뒷날 선조가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하자 술잔을 두들겨 사발만큼 크게 늘려 마시기도 했다. 이 잔은 현재 충북 진천 송강사에 보관되어 있다.

▲ 송강사 뒤의 정철 묘(뒷쪽). 앞은 둘째아들 종명의 묘다.

선조 8년(1575)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나아가 성균관사성을 맡았을 때엔 이미 동서로 갈라진 당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고 있었다.

서인에 속했던 송강은 율곡과 합세하여 동인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붕당을 없애고자 했으나 중도 온건파인 율곡은 송강의 강경책에 반대했다. 이에 송강은 벼슬을 버리고 창평으로 내려가고, 율곡도 수습책에 실패하자 강릉으로 낙향하니 조정은 동인의 천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송강은 임금이 불러 여러 차례 벼슬을 맡겼지만 그때마다 동인의 탄핵을 당해 출사와 낙향을 무려 14년이나 되풀이했다. 송강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선조 13년(1580) 45세 때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어서였다. 동인의 끈질긴 탄핵에도 감싸주는 임금의 후의를 더 이상 마다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