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이야기

'딴 사람 옆에서 오줌 누는 것, 목욕으로 퉁퉁 불어 쪼글쪼글해진 손, 자고난 얼굴에 베개자국 나는 것. 벽지를 손으로 박박 뜯는 것, 마룻바닥을 발로 광내는 것, 핸드백을 비운 후 먼지를 턴 다음 다시 물건을 넣는 것'

영화 '아멜리아'의 도입부에서 수다스럽게 밝히는 일상의 호불호(好不好) 리스트다. 어쩜 저렇게 기막히게 사소한 일상의 단면을 끄집어 냈을까,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랐던 부분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연애시대'에서도 평범한 일상에서 기막히게 포착해 낸 삶의 섬세한 결들을 엿볼 수 있다. 이혼 후 새롭게 찾아드는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두 남녀.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날카로운 현미경을 들이대듯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읊조린다.

사실 이러한 디테일의 승리는 일본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드라마 '연애시대'의 원작이 일본작가 노자와 히사시의 동명 소설이란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느린 호흡, 롱 테이크, 무심한 듯 의미심장한 대사와 행동들, 나른한 영상미. 일본영화의 감성을 대변하는 이러한 특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 가운데 압권은 단연 이와이 ??지의 '4월 이야기'다.

영화는 설레면서도 안타까운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훗카이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즈키는 짝사랑하는 선배를 따라 도쿄 인근의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한다.

학기 초 낯선 환경, 새로운 친구들에 둘러싸인 우즈키에게 대학 생활의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

친구 따라 얼떨결에 찾아간 낚시 동아리에는 마이너 취향의 기인들이 마치 호객행위라도 하듯 신입부원들을 모집하려 애쓰고 있고 같은 과 동기들이라는 인간들은 신입생다운 열기에 휩싸여 하나같이 들떠 있다.

하지만 우즈키, 그녀는 누구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살아간다. 그녀를 흔드는 사람은 오직 그녀의 짝사랑 야마자키 선배다. 선배를 만나기 위해 선배가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서점을 들락날락거리는 우즈키. 결국 그녀는 비오는 날 고대하던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된다.

영화는 빠른 호흡과 강렬한 클라이막스에 익숙한 우리 관객들(특히 남성 관객)에게 잔인하리만치 더디고 느긋하다. 또한 짝사랑에 빠진 우즈키의 감정은 보통의 남자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은근하다.

‘무사시’란 단어에 집착하는 모습이 그 한 예다. 우즈키는 ‘무사시’가 들어간 모든 책과 전설적인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가 연상되는 영화에서 ‘무사시노’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무료한 일상 속에서 비근하게 발견되는 엽기성이다. 우선, 주인공의 삶에 자연스레 파고드는 엽기적 인물들은 단조로운 이야기에 작은 굴곡을 만들어 낸다.

그녀를 낚시 동아리로 인도하는 불량 소녀, 옆집에 사는 외로운 싸이코 여성, 극장에 기생하는 변태남. 하나같이 영화의 멜로 라인을 흐트러트리는 황당한 인물들이지만 이들의 존재로 인해 영화의 일상성은 더욱 탄력 받는다.

이는 평범하다고 하는 우리네 삶을 이루고 있는 요소가 반복적인 일상 그리고 그 일상에 간간이 침투하는 엽기적인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디테일에 승부를 거는 영화 '4월 이야기'. 일본 영화의 새침한 미니멀리즘을 엿볼 수 있는 앙증맞은 소품과도 같은 영화다.

실제로 감독이 장편 작업으로 지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휴식하는 기분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편안함 뒤에 따라오는 무료함도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의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설정에 진저리난 관객들에게 이러한 무료함도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